LOGIN유니는 그제야 지안을 돌아보았다.
화려한 조명 아래 그녀의 눈동자가 고양이처럼 영악하게 빛났다.
“참… 성격 급한 거 알겠는데 좀 앉아서 이야기하지? 이 비싼 와인 향이라도 좀 맡으면서 말이야.”
지안은 혐오감을 숨기지 않은 채 그녀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가죽 시트의 서늘한 촉감이 지안의 신경을 자극했다.
그는 유니가 내미는 와인 잔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다시 말을 이었다.
“빨리 말해. 나 너랑 한 공간에 섞여 있는 거, 1초도 아까우니까.”
지안의 음성은 낮았지만, 공간을 가르는 서슬 퍼런 칼날 같았다.
바 테이블 너머로 비치는 도시의 야경조차 그의 차가운 기운에 얼어붙은 듯했다.
하지만 유니는
“별아, 오늘 저녁에 간만에 데이트 좀 할까? 내가 근사한 곳 예약해 뒀는데.” 지안이 서류를 덮으며 살짝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6개월간의 피 말리는 일정을 마치고 비자금 장부까지 손에 넣은 참이었다.이제 별이와 오붓하게 승전보를 나누고 싶었다.하지만 돌아온 별이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어… 지안 선배, 정말 미안해요. 어쩌죠? 저 오늘 보롬이랑 선약이 있어서요.보롬이가 안 좋은 일이 있다고 꼭 좀 와달라고 해서 일찍 퇴근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보롬이랑?” 별이가 안절부절못하며 지안의 눈치를 살폈다. 지안의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6개월 만에 공들여 잡은 데이트가 친구와의 약속에 밀리다니.지안의 미간이 좁아지는 걸 본 별이가 얼른 그의 책상 앞으로 다가와 지안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많이 기다렸을 텐데 정말 미안해요. 오늘 지안 씨 진짜 고생 많았잖아요. 내일은 제가 지안 씨 좋아하는 거 다 해줄게요. 알았죠?” 지안은 별이의 다정한 위로에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후다닥 가방을 챙기면서도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며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던 별이가 집무실을 나갔다. 지안은 허탈한 듯 헛웃음을 삼켰다. “누구는 목숨 걸고 장부 따왔더니… 하, 내가 보롬이한테 밀리다니.” 지안은 투덜대면서도 입가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그는 곧장 자켓을 챙겨 들고 휴대폰을 꺼내 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율아. 지금 회사지?” - “응. 아직 서류 볼
지안이 호텔로 오게 되었을 때 물려받을 곳이 빚더미뿐인 껍데기 회사가 되도록 만드는 것. 그것이 준휘가 선택한 비뚤어진 복수였다.그래서 그는 지난 5년 동안 강 의원과 손잡고 야금야금 호텔 돈을 빼돌리며 비자금을 만들었다.지안에게는 망해가는 호텔만 남겨주려 했던 것이다.그런데 그 5년치 범죄 기록들이 오히려 지안이 쳐놓은 덫에 한꺼번에 걸려들고 말았다. “강 의원이… 끝났다고? 이렇게 허무하게?” 지안이 밖으로 돌던 시절에도 준휘는 묵묵히 이 자리를 지켰다.나중에 지안이 돌아오면 터뜨리려고 준비했던 비장의 카드들이 거꾸로 자신의 목을 조르는 칼날이 되어 돌아왔다는 사실에 준휘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정신 차려, 준휘 오빠! 이건 천지안이 지난 6개월 동안 작정하고 우리를 낚은 거라고! 밀키트 사업을 미끼로 던져서 우리 아버지 비자금 장부를 통째로 털어간 거야!” 서희가 악을 쓰며 소리쳤다.아버지가 구속될 위기라는 사실보다 한때 무시했던 지안과 그 옆의 하찮은 비서에게 완벽하게 당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더 미치게 만들었다. “함정…? 아니, 이건 확인사살이야. 천지안 그 자식이 아예 내 숨통을 끊으려고 작정했다고! 이제 너희 아버지조차 날 지켜줄 수가 없게 됐어! 내가 어떻게 만든 판인데… 어떻게!” 준휘가 책상 위의 물건들을 닥치는 대로 쓸어버렸다.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다.서희는 그 난장판 속에서 넋이 나간 준휘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인생이 무너지고 있고 자신의 아버지는 감옥 문턱에 서 있다.이 모든 비극의 시작. 지안이 이렇게
“내가 원하는 건 강 실장님이 직접 이 자료를 들고 준휘 형한테 가는 거야. 그리고 전해줘요.” 지안의 입술 끝이 비릿하게 올라갔다. “이제 더 이상 강 의원님이 형의 방패가 되어줄 수 없다고. 이제부턴 각자도생이라고 말이야.” 정적만이 감도는 집무실 안.컵 속의 얼음이 힘없이 달그락 소리를 내며 녹아내렸다.서희는 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태블릿을 낚아채듯 챙겨 들었다.그녀의 패배를 알리는 종소리 같았다.집무실 문을 어떻게 열고 나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육중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등 뒤에서 사형선고처럼 울렸다.복도 끝 엘리베이터 앞에 서자마자, 꼿꼿하게 세웠던 서희의 무릎이 힘없이 꺾였다. “…하, 아…” 거친 숨이 터져 나왔다. 손에 쥔 태블릿 속 숫자들은 이제 단순한 데이터가 아니었다.10년 넘게 공들여 쌓아온 가문의 명예와 자신의 전부였던 준휘를 단번에 무너뜨릴 시한폭탄이었다. ‘아버지가… 구속될 수도 있어.’ 현직 의원인 아버지가 이 비자금 스캔들에 휘말리는 순간 강 씨 가문의 몰락은 시간문제였다.하지만 더 서희를 미치게 만드는 건 준휘였다.이 자료를 준휘에게 가져다주는 순간, 그를 지켜주던 가장 거대한 자금줄이 끊겼음을 고백해야 했다.준휘가 자신을 무능하다고 경멸하거나, 혹은 자신을 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전신을 휘감았다. “안 돼. 내가 어떻게 지킨 사람인데. 절대로 그렇게 안 둬.” 서희는 비틀거리며 일어났다.초점 없는 눈
그로부터 6개월이라는 시간이 흘렀다.천지호텔은 지안과 별이가 주도한 밀키트 사업의 대대적인 런칭과 확장을 거치며 매일이 전쟁터 같았다.하지만 그 치열한 공방전은 지안에게 오히려 기회가 되었다.유통 라인을 전국적으로 확장하며 기존 업체들을 조사하던 중 그들이 10년 넘게 숨겨온 비자금의 꼬리를 마침내 붙잡은 것이다.육중한 집무실 문이 닫히자 소란스러웠던 복도의 열기가 차단되었다.6개월 전, 로비에서 별이의 손을 잡았던 날의 파장은 이제 호텔 전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해일이 되어 돌아오고 있었다. “…선배, 여기 유통망 점검 최종 보고서예요.” 별이가 서류 파일을 내밀자 이제는 선배라는 호칭이 익숙해진 두 사람 사이에 깊은 유대감이 흘렀다.보고서를 훑는 지안의 눈매가 날카롭게 빛났다. “이번 전수조사에서 확실히 포착된 거지?” “네. 강 실장님이 관리하던 업체들 리베이트가 강 의원님 계좌로 흘러가는 정황을 밀키트 물류 계약 과정에서 실시간으로 잡아냈어요. 사업이 커질수록 저들도 꼬리를 감추기 급급하더라고요.” 지안은 모니터 화면 가득 띄워진 복잡한 자금 흐름도를 응시했다.율이 보내온 데이터는 단순한 리베이트를 넘어 현직 의원인 강 실장의 아버지가 연루된 거액의 세탁 정황을 가리키고 있었다.준휘가 그동안 당당했던 이유, 그건 결국 강 의원이 깔아준 비단길 덕분이었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지안이 비릿하게 웃으며 별이를 돌아보았다. “밀키트 사업이 생각보다 더 큰 선물을 가져다줬네. 한 비서, 바로 강 실장 호출해. 강 의원님이 최근 해외로 송금하신 내역에 대해 내가 직접 확인을 원한다고 전하고.”
“그리고 서희 실장님. 내 비서 걱정할 시간에 본인 팀 유통 라인이나 점검하시죠. 오늘 오전 중으로 그쪽에서 가로챈 계약들, 전부 제 자리로 돌아올 거니까.” “…뭐?” 여유롭던 서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지안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준휘를 비껴 지나가며 별이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았다. “가자, 별아. 업무 시작해야지.” 그 순간이었다.별이의 손을 맞잡기 위해 뻗은 지안의 왼손 약지에서, 그리고 지안의 손에 겹쳐진 별이의 손가락 위에서 은빛 반지가 동시에 찬란하게 빛을 발했다.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던 준휘의 표정이 마치 석상처럼 굳어버렸다.그 반지를 준휘가 모를 리 없었다.5년 전, 부모님의 납골당에서 처연하게 서 있던 별이를 처음 마주했을 때 그의 발밑으로 속절없이 굴러왔던 바로 그 반지였다.누군가를 향한 지독한 간절함이 새겨져 있던 문구.그리고 그 와중에도 자신에게 건넸던 감사해요라는 인사.준휘는 그날의 기억을 자신과 별이 사이의 기묘하고도 필연적인 인연의 시작이라 믿어왔다. 하지만 지금 그 간절함의 증거가 지안의 약지 위에서 보란 듯이 반짝이고 있었다.주인을 기다려온 그 반지가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았다는 듯이.준휘의 시선이 지안의 약지에 새겨진 문구 ‘Always with you’에 박혔다.자신이 별이에게 느꼈던 그 떨림이 사실은 지안을 향한 별이의 일편단심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준휘의 여유롭던 눈동자가 미친 듯이 일렁였다.지안은 반지를 낀 손으로 별이의 손가락 사이를 단단히 깍지 끼어 잡았다.두 사람의 손가락에서 같은 빛을 내는 반지가 준휘의 시야를 잔인하게 찔렀다.
지안은 별이의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은 채 에스코트하며 전용 엘리베이터가 아닌 직원들과 투숙객들이 북적이는 메인 로비로 향했다.3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남들 앞에서 내보이지 못했던 연인의 온기가 지안의 팔을 타고 전해졌다.어제 준휘의 폭언을 목격했던 직원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꽂혔다.수군거림이 파도처럼 번졌지만 지안은 그 어느 때보다 오만하고 당당한 걸음으로 로비를 가로질렀다. 그때, 로비 한가운데서 서희 기획전략실장과 대화를 나누던 준휘와 정면으로 마주쳤다.준휘는 지안이 대놓고 별이를 옆에 끼고 들어오는 모습에 눈썹을 미세하게 까닥였다.그는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천천히 다가와 지안의 앞을 막아섰다. “좋은 아침이네, 천지안 부총지배인. 어제 그렇게 급하게 가더니 오늘은 컨디션이 아주 좋아 보여?” 준휘의 목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타고 미끄러지듯 다가왔다.그의 시선은 지안의 어깨 너머, 그 품에 반쯤 가려진 별이에게 꽂혔다. 마치 먹잇감을 감상하는 포식자처럼, 불쾌할 정도로 끈적하고 여유로운 시선이었다. “근데, 아무리 사적인 감정이 앞서도 그렇지. 호텔 로비에서 비서랑 이런 그림은 좀 곤란하지 않나? 보는 눈들이 많은데 우리 천지호텔 품격도 좀 생각해야지.” 준휘는 짐짓 충고하는 척, 낮게 깐 목소리로 지안을 압박하며 주변 직원들의 눈치를 살폈다. 옆에 서 있던 서희 역시 잘 다듬어진 손톱을 매만지며 입가에 가느다란 비소를 띠었다.. “그러게요. 한 비서도 참 대단해. 어제 그런 일을 겪고도 하루 만에 이렇게 본부장님 옆을 꿰차고 나타날 정도면 보통 멘탈은 아닌 것 같네요. 역시 비서실 에이스다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