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우연은 죽는 순간이 되어서야 자신이 그저 소설 속 어느 인물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하찮은 조연에 불과함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 소설 속 여자 주인공은 소우연의 쌍둥이 여동생 소우희였다. 어릴 때부터 소우희는 만인의 사랑을 한 몸에 독차지했으며 소우연이 아무리 노력하고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해도 그들은 소우연에게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결국, 소우연은 쌍둥이 여동생 대신 악명이 자자하고 성격이 난폭한 회남왕 이육진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고 결혼식 당일 도망치다가 잡혀서 손발이 잘린 채 소씨 가문 앞에 버려졌다. 그리고 소우연이 그토록 사랑하고 소중하게 생각했던 가족들은 대문을 굳게 닫은 채 혹여라도 소우연과 엮이게 될까 봐 그녀를 모른 척했다. 그렇게 소우연은 살을 에이는 추운 겨울날, 소씨 저택 앞에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소우연은 이육진과 결혼하여 회남왕 관저로 보내지던 순간으로 되돌아갔다. 생의 기회를 다시 얻은 소우연은 이제 더 이상 누구에게도 잘 보이기 위해 힘들게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지난 생에 빼앗겼던 모든 걸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되찾겠다고 다짐하였다. 소우연은 이번 생에서 자신의 능력과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고, 뛰어난 의술로 수많은 귀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결국, 십몇 년 동안 소우연을 무시하고 하찮게 여겼던 소씨 가문 사람들은 그녀 앞에 무릎을 꿇은 채 용서를 빌었지만 마음을 굳게 먹은 소우연은 그자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부터 서로의 이익을 위해 합작을 약속했던 남자는 점점 소우연을 옥죄어 갔다. “이육진 씨, 당신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화가 잔뜩 난 소우연의 물음에 이육진은 그녀의 허리를 확 감싸며 대답했다. “목숨을 구해준 은혜를 갚아야지.”
View More그 순간, 소우연의 마음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복잡했다.한편으로는 평서왕비와 덕빈 사이의 오래된 정을 느낄 수 있었지만, 어쨌든 그녀는 평서왕비였다.다시 말해 그녀는 평서왕세자의 생모였다.그런 여인이… 정말 평서왕세자가 궁 안에서 그렇게 된 일을 모르고 있을까?그럴 수도 있었다.만약 알고 있었다면, 평서왕이든 평서왕비든 그녀를 이렇게 태연하게 마주하진 못했을 테니까.소우연이 말없이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옆에 앉아 있던 이육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렇다면… 그 날엔 나와 함께 가자. 혼자 널 그곳에 보낼 순 없어.”그는 그녀를 혼자 보낼 생각이 없었다.복잡하게 얽힌 집안사람들을 대하는 일은 결코 혼자 감당하게 둘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단귀비는 황릉에 묻혔다.장례가 끝나고 궁으로 돌아온 이육진은 말 한마디 없이 침전으로 향했고,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그대로 쓰러졌다.그는 그렇게 밤새 곤히 잠들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어느새 다음 날 정오였다.몸을 일으키려는 찰나.“부군, 일어나셨어요?”병풍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소우연이었다.이육진은 머리를 짚으며 낮게 중얼거렸다.“응, 이제야 깼구나.”“해가 중천에 떴습니다.”“미리 점심 상을 차려 뒀어요. 일어나셔서 한 숟갈이라도 좀 드세요.”소우연은 고개를 돌려 문밖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정연아, 주방에 태자 전하께서 일어나셨다고 전하거라. 어서 식사를 들라하고…”“예, 마마.”정연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왔다.소우연은 다시 침상 곁으로 돌아와 조용히 앉았다.“배고프시죠?”전날 오후부터 아무것도 입에 대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육진은 잠시 눈썹을 찌푸리며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먼저 좀 씻고 싶구나. 온 몸에 땀 냄새가 나는 것 같아.”소우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곧장 물을 준비하라 일렀다.식사가 준비된 뒤에도 그는 아직 욕조 안에 있었다.다행히 목욕을 마치고 나왔을 무렵에도 음식은 식지 않고 따뜻했다.그렇게 한 입… 또
“오늘 처음으로 네 아들을 봤단다. 정말 참 훌륭하게 자랐더구나.”평서왕비는 단귀비의 관에 조심스레 몸을 기대며 말했다.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고, 그 얼굴엔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었다.“우리가… 뭘 결정할 수 있었겠니?”“우린 아무것도 정할 수 없었어. 누구의 아내가 될지, 누구의 어머니가 될지… 그 모든 건 우리 뜻이 아니었지.”그녀는 그렇게 중얼이며 품속을 뒤적였다. 그리고 이내 조심스레 가위를 꺼냈다.“왕비마마…!”곁에 있던 나인이 놀라 외치고, 이육진과 소우연도 동시에 얼굴이 굳었다.혹시라도… 관 앞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 아닐까.방금 전까지만 해도 평서왕비의 말에 마음이 움직였던 소우연은 지금은 심장이 조여 오는 듯했다.그러나 아무도 말릴 틈 없이, 평서왕비는 길게 늘어진 자신의 머리카락을 한 가닥 잘라냈다.그리고 초록색 향낭을 꺼내, 그 머리카락을 정성껏 담았다.이육진은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혹여나 관을 해치기라도 할까 걱정했던 마음이 스르르 풀렸다.그 순간, 평서왕비가 이육진 앞에 섰다.“마마께서 말씀하신 적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희 두 사람은… 어릴 적엔 참, 가까운 사이였답니다.”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덕빈이 생전 소우연에게 했던 이야기, 그리고 소우연이 자신에게 전해준 이야기 모두… 그는 다 알고 있었다.평서왕비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육진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그땐 그랬답니다.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면, 적어도 저희의 우정만큼은 오래도록 이어가자고…”목이 메인 듯 한참을 침묵하던 그녀는 이내 향낭을 내밀며 조심스레 부탁했다.“이 머리카락을… 그녀와 함께 묻어주렴. 우리의 우정이… 함께 묻히지 않도록. 그래도 될까?”간절한 눈빛이 그 얼굴에 어려 있었다.이육진은 잠시 말을 잃었다. 대체 어떤 우정이었기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관에 함께 넣고자 하는 걸까.그것은 곧 그녀가 어머니를 단 한 번도 원망한 적 없다는 증거였다.이 광경을 지켜보는 백성들은 모두 평서왕비의 진심어린
어전에서 물러난 뒤,이육진은 머리는 무겁고 다리는 붕 뜬 듯한 기분에 휩싸였다.며칠째 계속된 문상 끝에 그가 제대로 잔 시간은 고작 네댓 시간.그 외의 시간은 온몸이 마비된 듯, 무감각한 감정 속에 잠겨 있었다.그는 마음도 몸도 분명히 아파왔다.피를 흘리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다. 그는 오직 덕빈에게 마지막 예를 어떻게 올릴 수 있을지에만 몰두하고 있었다.그러나 그 기회 마저도… 끝내 쟁취하지 못했다.단향궁에 돌아왔을 때, 덕빈을 귀비로 추봉하라는 성지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궁인들 모두 분주하게 움직이며, 단향궁 전체는 무거운 슬픔에 잠겨 있었다.그가 궁으로 들어서자 간석이 서둘러 달려와 말했다.“마마께서 전하께 잠시라도 쉬셨으면 하신다 전하셨습니다.”이육진은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저었다.그리고 곧장 영전으로 향해 향을 피운 뒤, 그 앞의 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세 번 머리를 조아렸다.그는 속으로 다짐했다.“언젠가는 반드시… 제가 어마마마를 직접 태후의 자리로 모시겠습니다.”이틀 후 단황귀비의 장례 행렬이 이어졌다.단황귀비는 창운국 전신 태자의 어머니였기에 많은 백성들이 그녀를 마중하러 나왔다.물론 그중에는 구경꾼도 있었지만, 그들 또한 단황귀비를 향해 무릎을 꿇고 배웅해야 했다.인파 속에서 소박한 옷을 입은 중년 귀부인이 유모의 부축을 받으며 의장대 맨 앞으로 나왔다.경호하던 호위병이 칼을 빼들었다. “단황귀비 마마이시다. 무례함을 삼가거라.”귀부인은 눈물을 머금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뒤에 희미하게 보이는 관에 시선을 고정했다. 슬픔이 북받쳐 눈물이 진주처럼 주르륵 흘러내렸다.호위병은 잠시 당황했다.알고 보니 그녀는 방해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장례 행렬은 마음대로 멈출 수 없었기에 조심스럽게 말했다. “부인, 슬픔은 잠시 절제해주십시오.”절제라니, 어떻게 절제할 수 있겠는가?그녀는 수년간 은거하며 검소하게 살았고,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 궁에 들어가 그녀를 찾아보지도
황제의 혼탁한 눈동자 속에는 반짝이는 빛이 어려 있었다. 어쩌면 그의 머릿속엔, 늘 그러하듯 아정의 젊은 시절 모습이 떠오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네 어미는 큰 죄를 지은 것은 아니나, 난 그로 인해 짐은 첫사랑을 잃었다. 짐이 일생을 바쳐 네 어미를 총애했으니, 이 영광을 감사히 여겨야 마땅하고 아정에게도 고마워해야 하는 것이 옳다.”그렇지 않았다면, 그녀의 친정 가문에서 조정에 몸담고 있는 자들은 단 한 명도 남지 못했을 것이다.“짐이 그녀를 황귀비로 추존한 것만으로도, 이미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존귀함을 준 셈이다. 진아, 짐과 네 어미 사이의 얽힌 감정은 마음에 담아두지 마라. 모자 지간의 사랑, 그리고 부자 지간의 사랑은 엄연히 다르지 않느냐.”잠시 말을 멈춘 황제는 이내 낮게 덧붙였다.“다만 짐은 네가 조금이나마 나의 어려움을 헤아렸으면 한다.”이육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고 있습니다.”“네가 이해해주어 다행이구나. 이 일로 인해 부자간의 정이 상해서는 안 된다.”“예, 아바마마.”서로의 속내를 어느 정도 털어놓은 뒤, 이육진은 조심스레 물었다.“그렇다면... 어젯밤 입궁한 이비 마마 말입니다. 어찌하여 그분을 그토록 총애하십니까?”황제는 아무런 숨김도 없이 답했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그 목소리는 아련하게 젖어 들었다.“아정은… 그녀와 너무도 닮았다. 동일 인물이라 할 만큼.”“아바마마께선 그 분의 진짜 얼굴을 확인하셨습니까? 어쩌면 그렇게 닮지는 않았을 수도...”“진아, 짐도 알고 있다. 세상에 완전히 같은 사람은 있을 수 없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닮았다면, 그 자체로 난 만족할 수 있다. 이비는 어디까지나 이비일 뿐. 아정을 대신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없겠지.”“네가 태자비를 진심으로 아낀다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진심으로 마음을 준 사람은… 절대 대체될 수 없다는 걸 말이다.”그 말에 이육진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다.“예,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
황제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그녀에게 짐이 정무로 바쁘니 시간이 나면 자연히 찾아갈 것이라고 전하라.”수현은 고개를 숙이고 물러났다.“예, 폐하.”지난 사람은 아직 땅에 묻히지도 않았건만, 아바마마는 벌써 새 여인을 어찌 달랠지부터 고민하고 있었다.이육진은 더 말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났다.그러나 황제가 그런 그를 불러 세웠다.“진아.”그렇게 말하며 황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용상을 돌아 나왔다. 그는 손짓하며 이육진을 불러 곁의 평상 자리에 앉게 하며 말했다.“우리 부자 간에도 속마음을 나눈 지 참 오래되었구나.”이육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그러합니다, 폐하.”“이 모든 세월 동안 짐이 네 어미를 어찌 대했는지는 네가 잘 알 것이다.”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다시 이어갔다.“짐이 네 어마마마를 황후가 아닌 황귀비로만 추봉한 이유를 아느냐?”이육진은 고개를 숙였다. 사실 아바마마가 이 일에 대해 어떻게 말할지 직접 듣고 싶었다.그는 조심스레 대답했다.“아들은 알지 못합니다. 폐하께서 말씀해 주십시오.”황제는 한숨을 내쉬며 물었다.“너는 태자빈을 진심으로 아끼느냐?”갑작스러운 질문에 이육진은 잠시 놀랐지만, 주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진심입니다.”“좋다. 만일 누군가 너희 사이를 갈라놓으려 한다면, 넌 어떻게 하겠느냐?”그녀와 헤어지라니?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그녀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황제가 그의 얼굴에 스쳐간 분노를 읽고 다시 물었다.“그래서 네 대답은 무엇이냐?”이육진은 단호하게 말했다.“폐하, 저는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두지 않을 것입니다. 감히 이간질을 꾀하는 자가 있다면 아들은 그 사람을 절대로 가만두지 않겠습니다.”황제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멍하니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짐에게도 한때 그런 여인이 있었다. 그 여인 말고는 누구도 아내로 삼고 싶지 않았지. 짐은 평생 그녀만을 아내로 삼겠다고 그녀에게 약속했었다.”이육진의 눈
그 여자와는 겉치레조차 할 필요 없었다.애초에 그녀는 평서왕 관저에서 심어놓은 하나의 말일 뿐, 태생부터가 적대적인 관계였다.어전 앞을 지키고 있던 어린 태감이 수현과 태자 전하가 오는 것을 보자 급히 달려와 예를 올렸다.“태자 전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폐하께 알리겠습니다.”“그러지.”얼마 지나지 않아 내시총관이 나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태자 전하, 들어가시지요.”이육진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곁에 있던 아령이 나서며 말했다.“수현, 폐하와 태자 전하께서 얼마나 오래 말씀 나누실지 아느냐?”수현은 태연하게 고개를 숙였다.“소인은 알지 못합니다.”아령은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을 참아왔지만 오늘은 도저히 못 참겠어서 폐하 안부라도 묻고자 나온 것이었다.그런데 웬걸, 이육진이 먼저 와버린 것이다.게다가 수현은 금은보화를 줘도 눈 하나 깜짝 않는 인물이었다.겉으로 부드러워 보여도 먹히는 수가 없었다.“그럼 나는 여기서 기다리겠다. 태자 전하께서 나오시면 내가 왔다고 폐하께 알려주게.”“예.”어전 안.황제는 손수 제문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장례의 규모를 어떻게 할지 그는 내내 고민하고 있었다.그는 한때 덕빈을 지독히도 미워했었다. 그녀만 아니었으면 아정은 그렇게서둘러 평서왕에게 시집가지 않았을 터였다.처음에는 기반을 굳히고 나서 덕빈을 냉궁에 보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계획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아들 하나를 낳아 버렸다.게다가 아정은 그에게 그녀를 잘 대해달라며 부탁했다.그는 이미 한 번 약속을 저버렸다. 아정을 정비로 삼지 못한 죄책감에, 그 후로 줄곧 그 분노를 꾹꾹 눌러가며 덕빈만을 총애했다.비록 황후 자리는 주지 않았지만 그 외의 영광은 전부 그녀에게 주었다. 그게 잘 대해준 거 아니었는가?그렇게 증오하던 그녀는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사흘 밤낮 동안 그는 많은 것을 떠올렸다. 문득, 자신이 혹시 진짜로 그녀를 오해했던 건 아닌가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그때 덕빈은 정말 아정에게 빨리 시집
“이 깊은 궁 안에서 내가 가장 믿는 건 너 뿐이야. 지금 내가 겉보기엔 화려해 보여도, 덕빈께서 이 중대한 시기에 돌아가셨으니 황제께서도 한 번을 들르지 않으셔. 지금 내 처지도 좋지 않아.”혜주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이다가도 곧 반짝이는 눈으로 아령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령의 능력을 믿고 있었다.더구나 어젯밤 임신을 위해 동침했을 때, 그녀는 똑똑히 들었다. 황제가 아령에게 애칭까지 지어준 것이다. 그는 아령이를 정이라고 불렀다.정이, 정이……그 이름만으로도 얼마나 아리따운 여인이며, 황제를 얼마나 사로잡았는지를 보여주는 충분한 증거였다.총애를 받는 건 시간문제일 뿐이었다.“우린 잘될 거야, 다 잘 될 거야.”아령은 혜주의 속내를 대략 읽고는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혜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이 새로 선택한 주인을 더욱 믿었다.그러고는 마지막으로 시선을 서랍으로 돌렸다. 베개와도 멀지 않은 곳. 바로 그 위에 소우희의 작고 희며 마른 손가락 마디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과연 이 밤, 편히 잘 수 있을까?아령은 슬쩍 그곳을 흘깃 보더니 말했다.“죽은 년일 뿐이야. 살아있을 때도 나한테 당해내질 못했는데, 죽었으니 더 아무짝에도 쓸모없지.”혜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소우희 같은 악독한 여자는 아령 같은 사람만이 억눌러 제어할 수 있었다.사흘 후, 덕빈의 입관식이 치러졌고 장례식 절차를 미리 준비하기 시작했다.소우연은 곁에서 효를 다하느라 이미 몸이 지쳐 있었다. 이육진이 얼마나 피로할지는 말할 것도 없었다.“부군, 내시총관이 왔습니다.”소우연은 종이돈을 태우고 있던 이육진에게 알렸다.고개를 돌리며 소우연을 바라보는 그의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었으며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수현은 먼지떨이를 휘두르며 무겁고 슬픈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태자 전하, 폐하께서 전하를 어서 어전으로 모시라고 하셨습니다.”어마마마께서 돌아가신 지도 한참 지났건만, 폐하는 단 한 번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이번에 부르는 이유가 무
이 후궁이라는 곳에서 벙어리는 소통이 어렵다. 주인의 뜻을 어떻게 제때 알아채고, 어떻게 요구를 해결할 수 있겠는가? 그러니 그는 누구보다 먼저 주인의 신뢰와 총애를 얻어야 했다. 그래야만, 자신만만하게 대체 불가능하다고 믿는 그 벙어리를 대신할 수 있으니까. 아령은 눈앞에 무릎 꿇고 있는, 불완전한 사내를 바라보며 문득 사람 위에 선 듯한 쾌감을 느꼈다. 수년간 그녀는 백화류에서 시작해, 이지윤의 사람이 되기까지, 언제나 조심조심, 눈치를 보며 살아왔다.윗사람 앞에선 다정한 척, 아랫사람 앞에선 넓은 아량을 베푸는 척하며 하루하루를 버텨온 세월이었다. 방금 전 혜주를 구해줬을 때만 해도, 혜주는 눈물까지 흘리며 감동했었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이토록 많은 비밀을 쥐고 있음에도, 그녀는 눈앞에서조차 예의를 차리지 않았다. 비로 봉해진 뒤, 그저 고개만 살짝 숙였을 뿐, 축하의 한 마디조차 하지 않았다.“이복, 이름 참 좋다. 바꾸지 마라.” 그녀가 이씨인 이유는 어머니가 처음으로 몸을 허락했던 은인의 성이 ‘이’였기 때문이다. 그녀의 생부 역시 성이 이씨였다.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 다시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이복은 고개를 끄덕이며 기뻐했다. “예, 소인이 명 받들겠습니다. 그럼… 저녁 식사는 어떠하실지요?”아령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본궁은 입맛이 없다.” 덕빈이 하필 이런 때 죽었으니, 황제가 그녀를 홀연히 잊어버릴지도 모른다.자신의 매력과 수완이라면 황제를 사로잡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정작 황제가 오지 않으면, 아무리 자신이 능해도 소용이 없지 않은가?이복은 그녀를 걱정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마마, 너무 염려 마십시오. 덕빈 마마께서 수년간 총애를 받으셨던 만큼, 황제께서도 당분간은 계속 마음에 두실 것입니다.”아령은 다시 이복을 바라보았다.이복은 또다시 무릎을 꿇으며 말했다. “소인이 주제넘게 말했습니다. 마마, 용서해 주십시오.”“일어나도 된
명화 궁으로 돌아왔다.아령은 몹시 화가 났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어쨌든 궁 안에는 황제가 붙여준 총관 태감과, 청소와 잔심부름을 하는 궁녀와 소태감 몇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궁중은 바깥과는 달라, 눈과 귀가 너무 많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령은 억울함을 떨칠 수 없었다. 온 힘을 다해 여기까지 왔건만, 어제 겨우 총애를 받았는데 오늘 바로 미움을 사게 된단 말인가?절대 그럴 수는 없다!혜주는 아령이 많이 화가 난 것을 알았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대신 가지고 다니던 작은 수첩을 꺼내 숯 연필로 이렇게 썼다.‘아가씨, 너무 화내지 마세요. 아직 시간이 많아요.’그 글씨를 본 아령은 눈썹을 찌푸리며 강한 예감을 느꼈다. 이 수첩, 나중에 분명히 문제가 될 거야.【왜?】아령도 수첩에 글씨를 써 보았다.그러고는 입을 열어 말했다.“혜주, 너 이 수첩 언제부터 가지고 다녔니?”혜주는 다시 쓰려고 했지만, 아령이 손을 뻗어 막았다.“앞으로는 가지고 다니지도 말고, 쓰지도 마. 바깥사람들한테도 계속 네가 글을 모른다고 해야 해. 아니면 나중에 아주 귀찮은 일이 생길 수 있어.”글을 쓰지 말 것, 글자를 안다는 것도 절대 들키지 말 것.사실 혜주는 간단한 글씨밖에 못 썼다. 배운 지도 얼마 안 되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아령과 오래 지낸 혜주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혹여라도 두 사람 사이의 흔적이 남는다면, 나중에 그것이 화근이 될 수 있다는걸.혜주는 망설임 없이 수첩을 찢었고, 아령에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이 수첩은 남겨서는 안 돼!수첩을 찢은 후, 혜주는 화로를 가져와 그 조각들을 모두 태워버렸다.아령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눈빛이 어두워졌다.혜주를 구해준 건 소우연을 견제하기 위한 수였고, 그녀는 비록 벙어리였지만, 소우연을 무너뜨리기 위해 글을 가르치게 했던 사람이었다.그런데 이 아이는 자신이 숨기고 싶은 많은 비밀을 알고 있다…하지만 주위를 둘러봐도, 믿고 쓸 사람이 없다.혜주는 수첩을 다 태운 뒤, 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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