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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결혼한 날, 나는 떠났다

그가 결혼한 날, 나는 떠났다

By:  무명Completed
Language: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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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을 사귄 남자친구는 나와 혼인신고를 하기로 한 약속을 99번이나 취소했다. 처음에는 새로 뽑은 여비서가 사무실에 갇혔다며 급히 회사로 돌아갔다. 나는 혼인신고를 하러 간 구청 앞에서 새벽까지 기다려야 했다. 다섯 번째에는 함께 신고서를 작성하던 중, 여비서가 거래처 고객에게 괴롭힘을 당한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갔다. 남겨진 나는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됐다. 그 후로 우리가 어느 날 혼인신고를 하기로 하든, 여비서에게는 어김없이 그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겼다. 결국 마음을 완전히 접은 나는 떠나기로 했다. 내가 남안시를 떠난 뒤, 송재원은 무려 5년 동안 미친 사람처럼 나를 찾아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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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제1화

송재원과 혼인신고를 하기로 한 약속이 벌써 99번째였다.

이번에도 나는 곱게 다려 놓은 원피스를 입고, 뜨거운 햇볕 아래 약속한 시간에 맞춰 혼인신고 접수처 앞에서 송재원을 기다렸다.

이제는 직원들도 내 얼굴을 알아볼 지경이었다. 한 직원이 나를 보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이 벌써 99번째죠? 남자친구분은 대체 오시기는 하는 거예요?”

“이렇게 여러 번 오시는 동안 처음 같이 왔던 부부는 벌써 이혼까지 했는데, 아직도 혼인신고를 못 하셨네요!”

내가 하도 자주 오다 보니 직원들은 언제쯤 혼인신고에 성공할지 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런데 내 성공에 돈을 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 멀리서 송재원의 BMW가 천천히 다가왔다.

눈이 번쩍 뜨인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성큼성큼 차를 향해 걸어갔다.

하지만 가까이 가기도 전에, 뒷좌석에서 커플룩을 입은 두 사람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송재원은 비서 고은서의 손을 잡고 구청으로 들어가려 했다.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

“이게 무슨 짓이야?”

송재원은 그제야 나를 발견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아, 오늘 너랑 혼인신고 하기로 한 걸 깜빡했네.”

“미안해. 은서가 집에서 결혼하라고 성화를 부린다면서 도와 달래.”

“걱정하지 마. 일단 은서 부모님을 안심시킨 뒤에 반드시 이혼할 거야. 그때 너랑 혼인신고 하면 되잖아. 응?”

그 말을 마친 송재원은 고은서의 손을 잡고 나를 지나쳐 가려 했다.

이것으로 벌써 100번째였다.

나는 주먹을 꽉 쥐고 마지막 미련을 담아 말했다.

“나, 이제 너를 백 번이나 기다렸어...”

송재원이 멈춰 서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은서가 가족한테 시달려 죽게 생겼는데, 그냥 두고 보라는 거야?”

“그렇게 못되게 굴지 좀 마.”

차가운 말투에 손끝이 떨렸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고개를 들자 고은서의 득의양양한 눈빛이 보였다. 하지만 입에서는 가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표님, 실장님이 싫다는데 그냥 관두세요. 뭐, 집에서 묶어 놓고 몽둥이로 때리는 것뿐이잖아요. 저는 괜찮아요.”

송재원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나를 밀쳐 냈다.

“신경 쓰지 마.”

오늘 송재원은 유난히 말끔하고 멋있었다. 새 옷에 머리까지 새로 손질한 모습은 나와 혼인신고를 하기로 했던 어느 날과도 달랐다.

어쩌면 처음부터 나와 혼인신고를 할 생각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자기 이미지에 그토록 신경 쓰는 사람이 인생에 남을 순간을 허술하게 남길 리 없으니까.

두 사람이 번호표를 뽑아 대기실에 앉는 모습까지 본 나는 미련 없이 택시를 잡아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백 번이나 다려 입었던 원피스를 벗어 가위로 갈기갈기 잘랐다. 그리고 불에 태워 흔적도 없이 없애 버렸다.

송재원과 함께한 7년도 저 원피스처럼 연기 속으로 사라질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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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화
송재원과 혼인신고를 하기로 한 약속이 벌써 99번째였다.이번에도 나는 곱게 다려 놓은 원피스를 입고, 뜨거운 햇볕 아래 약속한 시간에 맞춰 혼인신고 접수처 앞에서 송재원을 기다렸다.이제는 직원들도 내 얼굴을 알아볼 지경이었다. 한 직원이 나를 보더니 긴 한숨을 내쉬었다.“오늘이 벌써 99번째죠? 남자친구분은 대체 오시기는 하는 거예요?”“이렇게 여러 번 오시는 동안 처음 같이 왔던 부부는 벌써 이혼까지 했는데, 아직도 혼인신고를 못 하셨네요!”내가 하도 자주 오다 보니 직원들은 언제쯤 혼인신고에 성공할지 내기까지 했다고 한다.그런데 내 성공에 돈을 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그때 멀리서 송재원의 BMW가 천천히 다가왔다.눈이 번쩍 뜨인 나는 허리를 곧게 펴고 성큼성큼 차를 향해 걸어갔다.하지만 가까이 가기도 전에, 뒷좌석에서 커플룩을 입은 두 사람이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송재원은 비서 고은서의 손을 잡고 구청으로 들어가려 했다.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두 사람을 가로막았다.“이게 무슨 짓이야?”송재원은 그제야 나를 발견했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아, 오늘 너랑 혼인신고 하기로 한 걸 깜빡했네.”“미안해. 은서가 집에서 결혼하라고 성화를 부린다면서 도와 달래.”“걱정하지 마. 일단 은서 부모님을 안심시킨 뒤에 반드시 이혼할 거야. 그때 너랑 혼인신고 하면 되잖아. 응?”그 말을 마친 송재원은 고은서의 손을 잡고 나를 지나쳐 가려 했다.이것으로 벌써 100번째였다.나는 주먹을 꽉 쥐고 마지막 미련을 담아 말했다.“나, 이제 너를 백 번이나 기다렸어...”송재원이 멈춰 서서 미간을 찌푸렸다.“그럼 은서가 가족한테 시달려 죽게 생겼는데, 그냥 두고 보라는 거야?”“그렇게 못되게 굴지 좀 마.”차가운 말투에 손끝이 떨렸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고개를 들자 고은서의 득의양양한 눈빛이 보였다. 하지만 입에서는 가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대표님, 실장님이 싫다는데 그냥 관두세요. 뭐, 집에서 묶어 놓고 몽둥이로 때리는 것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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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집에 돌아온 뒤 정신없이 잠들었다가 눈을 뜨니 엄마에게 메시지가 와 있었다.[이번엔 성공했니? 언제 데리고 올 거야?]창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다.[이제 혼인신고 안 할 거예요.][엄마, 저 집에 가고 싶어요.]고향을 떠나 타지에서 몇 년이나 일하며 버틴 나였다. 하지만 모든 걸 내려놓고 돌아가 새 출발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처음이었다.엄마는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디자이너였다. 작지만,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작업실을 운영했고, 나는 어릴 때부터 그런 엄마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엄마는 자신의 인맥과 자원을 모두 내게 물려주려 했지만, 나는 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송재원을 만났다.금융학을 공부하던 송재원은 누구보다 성실했다. 온 가족이 가진 것을 쏟아부어 그를 공부시킨 터라, 집안의 도움을 받는 다른 학생들만 보면 열등감과 불안에 시달리곤 했다.그래서 나는 7년 동안 내 집안이 어떤 집안인지 한 번도 말하지 않았다. 그저 곁에서 함께하며 송재원이 조금씩 자신감을 얻기를 바랐다.그사이 송재원은 자기 회사를 세웠고, 나는 기꺼이 그 회사의 직원이 됐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우리 사이를 부러워했다.일도 사랑도 순조로워지는 듯했다. 혼인신고만 마치면 그를 부모님께 소개하고, 엄마의 인맥도 연결해 줄 생각이었다.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엄마는 곧바로 전화를 걸어 왔다.“그래, 집으로 오렴!”“엄마가 비행기표 끊어 놓을게. 도착하면 직접 마중 나갈 거야.”통화를 마친 나는 불을 켰다.환하게 드러난 침실은 텅 비어 있었다.대충 배달 음식을 시키고 영상을 넘겨 보다가 하필 고은서가 오늘 올린 혼인신고 브이로그를 발견했다.영상 속 두 사람은 내내 손을 맞잡고 있었다. 고은서를 바라보는 송재원의 얼굴에는 다정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평소 웃음기 하나 없는 대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재원 오빠를 좋아한 지 3년! 드디어 사랑의 결실을 보았어요!]댓글에는 둘이 잘 어울린다며 야한 이야기는 언제 보여 줄 거냐는 짓궂은 질문까지 달렸다.고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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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옆에서 모든 걸 지켜본 하윤아는 화가 나 얼굴이 새빨개졌지만, 꾹 참고 물었다.“정말 떠나실 거예요?”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오늘 송재원에게 결재받아야 할 기획서를 챙겨 그의 사무실로 들어갔다.들어가자마자 송재원이 고은서를 품으로 끌어당기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나를 발견한 고은서는 당황한 목소리로 변명했지만, 송재원은 오히려 그녀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제가 발을 헛디뎌서 넘어진 것뿐이에요! 저희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송재원은 흐트러진 옷깃을 정리하고 있었다.7년 동안 그는 사무실에서 나와 조금이라도 연인다운 스킨십을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하지만 그의 목에 선명히 남은 키스 자국을 보니 눈이 시렸다.‘그렇게 급했나... 퇴근할 때까지도 못 기다릴 만큼?’나는 고개를 끄덕였다.“괜찮아.”그리고 아직 옷매무새도 다듬지 못한 송재원 앞으로 서류를 내밀었다.송재원은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히며 내게 화를 냈다.“심서연, 들어올 때 노크도 안 해?”“그리고 나 바쁜 거 안 보여? 꼭 이럴 때 서류를 들이밀어야겠어?”나는 차분하게 대답했다.“오해하지 마. 검토받을 프로젝트 기획서를 가져온 것뿐이야.”송재원은 한참 내 표정을 살폈다.“정말 그것뿐이어야 할 거야.”그러고는 서류를 고은서에게 넘겼다.“그거 다음 분기 핵심 프로젝트야.”내가 오랫동안 준비해 온 결과물이기도 했다.“은서가 검토하는 게 곧 내가 검토하는 거야.”송재원은 나를 무심하게 흘겨봤다.고은서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기획서를 대충 몇 장 넘기더니 내 쪽으로 내던졌다.“이건 좀 아닌데요? 심 실장님 실력이 겨우 이 정도예요? 다시 해 오세요.”나는 숨을 깊이 들이쉬고 바닥에 떨어진 서류를 주워 망설임 없이 사무실을 나왔다.문밖에서 듣고 있던 하윤아가 분통을 터뜨렸다.“디자인 공부도 안 한 사람이 뭘 안다고 저래요!”고은서가 나를 괴롭히려는 것뿐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나는 기획서를 하윤아에게 건넸다.“내가 떠난 뒤에 조금 손봐서 다시 제출해.”“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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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송재원은 고은서의 손을 뿌리치고 그 자리로 다가갔다. 테이블에는 자신이 선물했던 고급 차의 열쇠가 고스란히 놓여 있었다.음식에는 손댄 흔적이 없었고, 물만 반쯤 줄어 있었다.고은서가 다가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화장실 갔겠죠. 대표님, 물도 많이 마셨잖아요.”송재원은 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그렇겠지.”하지만 밤이 깊도록 송재원이 몇 번이나 돌아봐도 심서연은 돌아오지 않았다.그때 휴대전화에 알림이 떴다.심서연이 보낸 송금 내역이었다. 메모에는 ‘선물값’이라고 적혀 있었다.‘이게 무슨 뜻이지?’송재원은 더는 참지 못하고 발코니로 나가 전화를 걸었다.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돌아오는 안내는 같았다.상대방의 휴대전화가 꺼져 있다는 말뿐이었다.그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정말 예의 없군. 아버지께 차 한 잔 올렸다고 또 이렇게 떼를 쓰는 건가?’그러다 문득 죄책감이 들었다.‘아마 아버지가 서연이를 나에게 얹혀사는 여자 취급했는데도 바로잡아 주지 않아서 화가 났을 거야.’‘원래 자존심이 센 사람인데 그런 일을 당하고도 차를 올려 드린 것만 해도 대단했어.'그렇게 생각하니 송재원은 조금 마음이 놓였다.오늘 밤 집에 돌아가 잘 달래 주기로 했다.그때 고은서가 자기 옷에 술을 조금 뿌리더니 취한 척 송재원에게 다가왔다.고은서는 그의 등에 머리를 기대고 작은 목소리로 칭얼거렸다.“대표님, 여기 있었어요? 아버님이 술을 몇 잔이나 주셔서 어지러워요...”송재원의 몸이 굳었다.“기사 불러서 집에 가.”고은서는 송재원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하고 계속 애교를 부렸다.“싫어요. 대표님이 데려다줘요...”송재원은 혀를 차며 고은서의 머리를 밀어냈다.“귀찮게 하지 마.”“그리고 내가 선 넘지 말라고 경고했지?”“오늘 사무실에서 그런 짓을 한 것까지는 눈감아 줬어. 그런데 서연이 앞에서 우리 아버지를 아저씨가 아니라 아버님이라고 부른 건 무슨 뜻이야? 진짜 네가 내 아내라도 된 줄 알아?”고은서는 술을 잘못 뒤집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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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송재원은 할 말을 마치고서야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곧바로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갔다. 심서연에게 설명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았다.그는 거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그래서 차 안 거울에 비친 옷매무새를 다듬은 뒤 미소를 지으며 들어섰다.그러나 문을 열자마자 그 미소가 얼어붙었다.“이모님, 아직 안 가셨어요?”가사도우미가 웃으며 심서연이 아침에 준비해 두었다는 선물을 꺼냈다.“서연 씨가 준비하신 결혼 선물이에요. 오늘은 꼭 혼인신고를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셨어요. 저녁 7시까지 안 돌아오시면 대신 전해 달라고 하셨고요.”아주머니의 손에는 정장 한 벌이 들려 있었다.송재원은 단번에 알아봤다. 오랫동안 꿈꿔 왔던 바로 그 정장이었다.“서연 씨가 직접 한 땀 한 땀 만드셨어요. 석 달이나 걸렸다더라고요.”“마음에 드세요?”송재원은 천천히 정장에 손을 얹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원단이 손끝에 닿았다.“네...”“서연이가 다른 말은 안 했나요?”아주머니는 주소가 적힌 쪽지를 내밀었다.“여기요. 가 보시면 깜짝 놀랄 일이 있을 거래요.”송재원은 쪽지를 받아 들고 정장을 조심스레 갈아입었다. 그리고 적힌 주소를 향해 급히 달려갔다.강변에 도착하자 수많은 드론과 대기 중인 행사 직원들만 보였다.심서연은 없었다.아직 나오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했다.한참을 기다리다 직원 한 명을 붙잡고 물었다.직원은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이어서 드론 공연의 시작을 알렸다.드론들이 하나둘 밤하늘로 올라갔다.송재원은 거듭 물었다.“심서연은요?”“심서연 어디 있어요!”아무도 답하지 않았다.분명 로맨틱해야 할 순간인데 공연장은 섬뜩할 만큼 고요했다.하늘에 뜬 드론들은 두 사람이 만나 사랑에 빠지기까지의 이야기를 펼쳐 보였다.유학 시절 첫 만남, 첫 고백, 처음 함께한 송재원의 생일, 그리고 심서연이 처음 번 돈을 남김없이 송재원의 창업 자금으로 내놓았던 순간까지...모든 장면의 중심에는 송재원이 있었다. 심서연은 마치 그를 위해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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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심서연의 행방을 알아내기 전, 송재원은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가사도우미는 맡은 일을 마치고 퇴근한 뒤였다.그는 오늘 고은서 때문에 내뱉었던 말들을 몇 번이고 후회했다.텅 빈 침실을 보자 차마 오래 바라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정장을 벗고 곧장 회사로 돌아가 밤을 보내기로 했다.집에 온 적도 없고, 심서연이 사라진 것도 아니라고 스스로 속였다.그저 회사에서 야근 중이라고 생각하면 될 일이었다.그러다 책상 위 액자에 시선이 닿았다.언제부터였을까. 심서연과 함께 찍은 사진이 고은서의 사진으로 바뀌어 있었다.그 사진을 본 심서연이 왜 바꿨느냐며 따졌던 게 언제였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그때 송재원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사진 한 장 가지고 왜 그래?”하지만 지금은 그 순간 심서연의 얼굴이 얼마나 창백했는지 선명하게 떠올랐다.머릿속에서 무언가가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송재원은 서랍을 뒤져 맨 아래 칸에서 오래된 사진을 찾아냈다.기억이 났다.연애 4주년이자 회사를 설립하던 날 찍은 사진이었다.당시 송재원은 아직 풋풋했고, 사진 속 심서연은 침착한 미소로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그토록 소중한 사진을 서랍에 처박아 먼지나 쌓이게 하다니.그러고 보니 연애 5주년에는 약혼을 했다.순간 송재원은 아침에 버렸던 반지가 떠올랐다.곧바로 사무실 밖 쓰레기통으로 달려갔지만 이미 비워진 뒤였다.청소 담당 직원에게 묻자 쓰레기를 아래층으로 가져갔다고 했다.“대표님, 지금 가 보시면 아직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쓰레기차는 밤 12시에 오거든요.”송재원은 망설임 없이 뛰어 내려갔다.시간은 밤 11시 반이었지만 거리는 여전히 북적였다.그런데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쓰레기통 쪽을 향했다.비싼 정장을 입은 남자가 쓰레기통 안에 상반신을 들이밀고 뒤지고 있었다.송재원은 몇 번이나 헛구역질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은 괜찮은지, 도움이 필요한지 물었다.하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제가 저지른 일이니까 제가 찾아야 해요...”“반지만 찾으면 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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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송재원은 뒤를 돌아보자마자 고은서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네가 무슨 낯짝으로 나를 찾아와?”고은서는 멍해졌다가 곧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친구들 SNS에 대표님이 여기 있다는 글이 올라와서 바로 달려온 건데, 왜 저한테 이래요?”“일단 저랑 돌아가요.”고은서가 송재원을 일으키려 손을 잡았다.하지만 송재원은 손을 뿌리치고 그녀를 밀어냈다.“꺼져. 네 동정 따위 필요 없어.”“네가 회사 단체방에서 입만 함부로 놀리지 않았어도 내가 이 지경이 됐겠어?”고은서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빡였다.“무슨 말이에요? 누가 저에 대해 뭐라고 했어요?”송재원은 휴대전화에 저장해 둔 대화 내용을 고은서의 앞에 내밀었다.“내가 틀린 말 했어? 처음부터 네 생활을 책임져 주기로 했을 때, 서연이 앞에서는 절대 티 내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잖아!”“그런데 넌 뭘 했어?”“회사에서 네 직위를 이용해 일부러 서연이 앞에서 나랑 무슨 사이인지 자랑했잖아!”“직원들이 알려 주지 않았으면 난 끝까지 몰랐을 거야!”고은서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휴대전화를 낚아채려 했지만 송재원이 막았다.“누가 알려 준 거예요?”“대표님, 제가 잠깐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랬어요. 제발 이러지 말아요...”송재원은 급기야 무릎을 꿇고 비는 그녀를 차갑게 내려다보았다.“저를 버리지 말아요. 정말 가족들한테 맞아 죽을지도 몰라요...”고은서는 눈물과 콧물을 쏟으며 울었다.하지만 송재원은 심서연도 찾지 못하고 반지마저 잃어버린 터라 이미 마음이 얼어붙어 있었다.“그게 나랑 무슨 상관인데?”“네가 몰래 단체방에서 헛소리만 안 했어도 서연이가 상처받을 일은 없었어. 상처받지 않았으면 나를 떠날 일도 없었겠지!”송재원은 나직이 말하더니 갑자기 고은서의 목을 움켜쥐었다.“다 너 때문이야!”고은서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송재원이 자신을 이렇게 대하는 건 처음이었다.비서에 불과했지만 그동안 원하는 것은 뭐든 손에 넣었다.혼인신고만 마치면 떳떳하게 송재원 곁을 차지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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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한편 내가 남안시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이었다.마중 나오겠다고 했던 엄마도 졸음을 이기지 못해 먼저 잠들어 있었다.하지만 익숙한 집 문을 열고 불을 켜자 곧 침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우리 딸, 왔니?”엄마가 다정한 목소리로 계단을 천천히 내려왔다.아직 잠이 덜 깬 얼굴이었다.나는 달려가 엄마를 꼭 안았다.“엄마...”엄마도 웃으며 나를 끌어안았다.“돌아왔으면 됐다. 정말 잘 왔어. 배고프지는 않니?”나는 고개를 저었다.“그럼 얼른 쉬어. 네 방은 미리 깨끗하게 치워 두라고 했어.”엄마를 더 붙잡고 이야기하기가 미안해 고개만 끄덕였다.방은 7년 전 떠나던 날과 똑같았다.시간이 그 순간 멈춘 것만 같았다. 나는 다시 갓 대학에 들어갔던 시절의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이틀을 쉬고 나서는 작업실을 여는 일에 몰두했다.송재원의 회사에서 일하며 이미 많은 인맥을 쌓아 둔 덕분에 작업실 문을 열자 예전 고객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기 시작했다.엄마는 자신의 고객들이 올 때마다 내 작업실도 적극적으로 추천했다.“우리 서연이가 얼마나 똑똑하고 솜씨가 좋은데요.”고객들도 입을 모아 칭찬했다.“어머니 젊으셨을 때랑 똑같네요.”엄마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나는 그제야 엄마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깨달았다.조그만 작업실에 드나드는 고객들이 하나같이 거물급 인사였다.한 달 뒤에는 엄마와 함께 이곳저곳 산에 오르며 시간을 보냈다.산 위에서 나란히 노을을 보던 엄마가 나를 위로했다.“서연아, 살다 보면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참 많아. 사랑도 억지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란다. 하지만 마음이 맑고 단단하다면 분명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가끔은 엄마가 네 아빠와 헤어진 일 때문에 네가 사랑을 그렇게 붙잡으려 했던 건 아닐까 생각해. 어른에게는 사랑 말고도 소중한 게 많거든. 다만 네 아빠와 나 사이에는 사랑밖에 없었어.”“생각해 보니 그 사람은 아직도 네 존재조차 모르지. 하지만 이제 와 알 필요도 없단다.”“우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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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나는 미소를 지었다.“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야?”고객이 난처해하자 직원에게 눈짓해 안쪽으로 안내하게 했다.나는 송재원을 데리고 밖으로 나왔다.“우린 이제 아무 사이도 아니야. 송재원, 여기서 소란 좀 피우지 마.”한 달 남짓 못 본 사이 그는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널 찾으려고 얼마나 오래 헤맸는지 알아? 그런데 넌 왜 나한테 기회조차 안 주는 거야...”“기회는 이미 백 번이나 줬어. 앞으로 천 번, 만 번을 더 줘야 해? 고은서 일만이 아니잖아. 네 아버지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 너도 알잖아.”송재원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네가 떠난 날 밤에 집으로 돌아가서 달래 주려고 했어. 그런데 이미 사라지고 없더라...”나는 헛웃음을 쳤다.“그만 좀 해. 내가 진짜 떠나 버렸으니까 인제 와서 그런 소리를 하는 거잖아.”“내가 안 떠났으면 그날 밤에도 고은서랑 함께 있었겠지.”송재원은 입술만 달싹일 뿐 대답하지 못했다.“나, 나는... 은서를 경찰에 넘겼어.”고은서와는 이미 이혼했고 모든 연락도 끊었다며,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고 변명했다.“한 번만 기회를 주면 안 될까? 정말 잘못했어...”그가 내 손을 잡으려 했지만 나는 피했다.“더는 역겨운 짓 하지 마.”차갑게 내뱉은 말에 송재원은 한 걸음 물러섰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그 모습을 보니 예전의 내가 떠올랐다.상처를 받아도 아무 말도 못 했던 그때의 나...‘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눈에는 저런 모습이 정말 처량하게 보이는구나...’나는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돌아섰다.친구처럼 지내던 고객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누구예요?”“좀 집요하게 구는 전 남자친구예요.”“그런데 저 정장은 자기를 위해 맞춤 제작한 거라던데요?”나는 망설임 없이 끄덕였다.“맞아요. 제가 직접 만든 거예요. 그때는 사랑했으니까요. 지금은 아무 상관 없지만요.”“원하시면 저 옷에 들어간 개인적인 장식은 전부 빼고 고객님 취향에 맞춰 새로 만들어 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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