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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화. 객실 하나 남음

[채이]목요일 아침 일곱 시 비행기는 반쯤 비어 있었다. 나는 창가, 그는 통로. 그는 이륙 십 분 만에 태블릿을 켰다. 보고서. 하늘 위에서도 결재는 된다."비행기 자주 타요?""한 달에 두세 번.""제주는요?""리조트 부지 보러 한 번. 당일로.""그럼 바다는 못 봤겠네요."그가 태블릿에서 눈을 뗐다. 잠깐 생각했다."……창문으로는 봤습니다. 회의실 창문."창가 쪽으로 몸을 비켜 앉았다. 구름 사이로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보세요. 회의실 창문보다는 크죠."그가 몸을 기울였다. 어깨가 내 어깨에 닿았다. 그는 그걸 알면서도 떼지 않았다. 바다가 다 지나갈 때까지. 나도 안 뗐다. 비켜 앉을 자리가 없었다고 해 두자. 사실은 있었다.애월 목공방은 해안도로에서 한참 들어간 돌담집이었다. 마당에 나무 판자가 비스듬히 쌓여 있었다. 톱밥 냄새가 바람에 섞였다.작업복 차림의 남자가 대패질을 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손이 컸다. 우리를 보고 대패를 내려놓았다. 놀라지 않았다. 올 줄 알았다는 얼굴."서진우 씨죠."그가 먼저 말했다."네.""강재헌입니다.""압니다. 신문에서 봤어요."말이 느렸다. 한 마디 하고 한 박자 쉬었다. 대패질하는 박자 같았다. 진우 씨가 나를 봤다."채이 씨죠. 세라가 매일 얘기해요. 안전핀 일곱 개.""……언니 어디 있어요."진우 씨가 뒤쪽 창고를 봤다. 문이 한 뼘 열려 있었다. 틈으로 눈 하나가 보였다가 사라졌다."하세라. 나 비행기 타고 왔어. 아침 일곱 시 거. 다섯 시에 일어났어. 나와."창고 문이 열렸다. 언니가 나왔다. 회색 티셔츠, 헐렁한 바지, 대충 묶은 머리. 결혼식 날 속눈썹을 붙이던 사람과 같은 사람 같지 않았다. 얼굴이 편해 보였다. 살이 붙어 있었다."채이야. ……미안해."걸어갔다. 앞에 섰다. 손을 들었다. 언니가 눈을 질끈 감았다.안았다. 꽉."밥은 먹고 다닌다며. 살쪘네."언니가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소리 내서 울었다. 진우 씨가 대패를 다시 집었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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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호명

[채이]펜션 현관 불빛 아래서 언니는 이야기를 쏟아냈다. 한 번 시작하자 멈추지 않았다. 둑이 터지면 원래 그렇다."그날 아침 열 시. 화장 끝나고 나 혼자 대기실에 있었어. 회색 양복이 노크했어. 강 전무님 비서라고. 봉투를 줬어. 안에 제주행 비행기표. 오후 세 시 사십 분. 그리고 전하래. 지금 아니면 평생 못 간다고. 결혼하면 그 사람은 영영 못 본다고.""그 사람이 진우 씨를 알았어?""다. 언제 만났는지, 어디서. 나도 몰랐던 것까지."언니가 작업복 재킷을 여몄다."무서웠어. 근데 솔직히 고마웠어. 누가 문을 열어 주는 것 같아서. 열두 시 십 분에 비상계단 문 열어 둘 테니까 트렁크는 미리 계단에 갖다 놓으래. 그다음은 신경 쓰지 말래. 식장은 알아서 될 거라고.""알아서."알아서 된 게 아니었다. 내가 뛰었다. 원장님이 계단에 주저앉았다. 예약 일곱 건이 날아갔다. 그 사람은 식장이 무너지길 바랐다. 신랑 혼자 서 있는 사진을 원했다."문자는 남아 있어요?"그가 처음 입을 열었다."그 남자가 보는 앞에서 지우라고 했어요. 번호도. 비행기표는 공항에서 버렸고. 미안해요. 증거가 제 말밖에 없어요.""사과는 제가 해야 합니다. 형이 한 일이니까."언니가 처음으로 그를 똑바로 봤다. 세 번 만나는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안 본 얼굴을."부사장님. 채이, 잘 부탁해요. 얘 괜찮은 척 진짜 잘해요. 어릴 때부터.""압니다."너무 빨리 대답해서 언니가 눈을 깜빡였다. 나는 못 들은 척 문틀만 봤다. 펜션 문틀은 흰색이었다. 페인트가 벗겨진 자리가 세 군데. 다 셌다.[재헌]방으로 돌아와 불을 켰다. 소파에 앉지 않았다. 창가에 섰다. 단추를 돌리지 않았다.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괜찮아요?""화가 납니다."솔직하게 말했다. 거짓말 안 하기로 했으니까. 그 약속이 이럴 때 불편하다는 걸 알았다."형이 날 싫어하는 건 압니다. 대표 자리도 원하고. 그건 괜찮습니다. 그런데 당신 홀을. 원장님을.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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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화. 하객 쉰 명

[채이]큰어머니는 대학병원 육 인실 창가 침대에 있었다. 링거. 감은 눈. 과로에 저혈압, 이틀 쉬면 된다고 간호사가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숨을 쉬었다.언니가 보호자 의자에 앉아 있었다. 제주 첫 비행기로 올라왔다고. 회색 티셔츠 그대로.큰어머니가 눈을 떴다. 나를 알아보는 데 이 초. 알아보자마자 얼굴이 굳었다."네가 여길 왜 와. 나가. 네 얼굴 보면 혈압 올라."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래서 더 아팠다. 소리 지르는 큰어머니가 차라리 나았다.탁자에 죽 봉지를 내려놓았다. 엄마가 새벽에 쑨 호박죽. 한복집 둘째네가 보냈다고 하면 안 먹을까 봐 봉지엔 아무것도 안 썼다. 익명 기부다."이것만 두고 갈게요."엘리베이터 앞에서 언니가 소매를 잡았다."엄마가 어젯밤에 누구랑 오래 통화했어. 네, 네, 감사합니다. 세라가 말만 잘하면. 그 사람이 돈 빌려준대. 아빠 회사 은행 빚 전부. 대신 내가 기자들 앞에서 말하는 거야. 그날 떠밀렸다고. 원래 신부는 나였다고.""……그건 반은 맞는 말이잖아.""응. 그래서 무서워. 반만 맞는 말은 다 거짓말보다 잘 먹혀."엘리베이터가 열렸다. 타지 않았다."할 거야?"언니는 병실 쪽을 돌아봤다. 커튼 사이로 링거 줄."모르겠어. 엄마가 저렇게 누워 있는데."계단으로 내려갔다. 한 층마다 안전핀을 열었다 닫았다. 일 층에서 엄지 끝이 벌겋게 부어 있었다. 열두 층. 열두 번. 기록 경신이다. 자랑할 기록은 아니다.[재헌]그날 밤 그녀가 다 말했다. 숨기지 않기로 했으니까.끝까지 들었다. 휴대폰을 들었다."정석푸드 빚. 얼마인지 백 실장이 알아낼 수 있습니다. 내가 먼저.""안 돼요."그녀가 휴대폰을 덮었다. 손바닥으로."재헌 씨가 돈으로 막으면요, 전무님이랑 똑같아져요. 돈 주고 언니 입 막는 거잖아요. 방향만 반대지.""……""큰어머니는 평생 그걸 들고 살 거예요. 채이 남편이 우리 빚 갚아 줬다. 그럼 우리 집이랑 큰집은 영영 끝이에요."휴대폰을 내려놓았다. 그녀 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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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화. 원래 신부 입장

[채이]속보가 뜨고 삼십 분 만에 기사가 열두 개로 불었다. 기자석 열두 자리가 생각났다. 한 자리에 하나씩.로즈룸 칸막이에 기대앉아 하나씩 열었다. 내용은 비슷했다. 내일 오전 열 시, 시내 컨벤션센터 소회의실. 하세라 씨 측 대리인이 기자들에게 문자를 돌렸다. 그날의 진실을 말하겠다."대리인. 언니한테 대리인이 어디 있어. 필라테스 강사가."그가 누군가와 짧게 통화하고 끊었다."그 대리인, 작년까지 우리 그룹 법무팀에 있던 사람입니다. 지금은 개인 사무실. 형이랑 대학 동기고."휴대폰을 무릎에 내려놓았다. 바닥에 꽃잎이 몇 장 남아 있었다. 두 시간 전 여섯 명이 노래하던 자리. 하루에 잔치와 전쟁이 같은 방에서 열렸다. 예식장에선 흔한 일이다. 오늘은 내 일이라서 흔하지 않았다.언니한테 다섯 번 걸었다. 받지 않았다. 문자를 보냈다.[언니. 내일 가지 마. 아니면 가기 전에 나 한 번만 봐.]읽음. 답 없음.윤 팀장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홍보팀에서 오늘 밤 입장문을 먼저 내자고 합니다. 원래 신부 측 주장은 사실무근이라고.""안 돼요. 먼저 내면 언니랑 싸우는 거예요. 무슨 말을 할지도 모르는데."윤 팀장이 그를 봤다. 그는 나를 봤다."……내일 들어 보고 정합니다. 홍보팀엔 대기하라고 하세요."윤 팀장이 나갔다. 그가 칸막이에 나란히 등을 기댔다."내일 봄빛 첫 식, 몇 시입니까.""열한 시 반이요.""회견장까지 삼십 분. 열 시에 시작해서 열 시 반에 나오면 됩니다.""……가자고요?""당신은 가고 싶잖습니까. 언니 얼굴 보려고. 그럼 같이 갑니다."[재헌]새벽 한 시. 둘 다 잠을 못 잤다.그녀가 거실로 나왔을 때 나는 이미 버팀이 옆 바닥에 앉아 있었다. 누룽지는 데우지 않았다. 물컵 두 개. 하나는 그녀 몫.그녀가 옆에 앉았다."언니가요, 저 초등학교 입학식 날 머리를 땋아 줬어요. 양 갈래로. 엄마는 폐백 한복 배달, 아빠는 다듬이질하고. 아무도 없는데 언니가 큰집에서 걸어와서. 자기도 학교 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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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 답례품

[채이]수도를 잠갔다. 언니 손을 잡은 채 화장실 바닥에 같이 쪼그려 앉았다. 타일이 차가웠다. 봄빛 직원 화장실은 난방이 안 된다. 원장님은 이십 년째 고친다고 하신다."언니. 숨부터. 나 따라 해. 들이쉬고. 내쉬고."세 번쯤 하자 언니 어깨가 내려갔다."이제 말해 봐. 천천히. 뭐가 있는지부터.""뭐가 있는지?""식장에서 사고 나면 그렇게 해. 소리 지르기 전에 뭐가 남아 있는지부터 봐."언니가 코를 훌쩍이며 휴대폰을 꺼냈다."엄마 휴대폰에서 몰래 찍었어. 엄마 링거 맞고 자는 동안."은행 앱 화면을 찍은 사진. 입금 내역. 보낸 사람 이름이 법률사무소였다. 그 대리인의 사무실.금액을 봤다. 숫자를 두 번 셌다. 한복집에서 평생 바느질을 해도 만지기 힘든 돈."이 돈만 돌려주면 돼?""응. 근데 돌려줄 돈이 없어. 아빠 회사는 그 돈 없으면 다음 달에 문 닫아."휴대폰을 돌려줬다."내일 한복집 와. 큰아버지랑 같이. 아침 여덟 시.""한복집?""응. 인두 데우는 시간."[채이]일요일 여덟 시. 하가네 한복집은 셔터를 끝까지 내렸다.가게 안에 사람이 꽉 찼다. 작업대 한쪽에 아빠와 엄마. 맞은편에 큰아버지와 언니. 나는 옷감 두루마리 옆 플라스틱 의자. 재헌 씨는 가게 밖. 집안 얘기라고 내가 부탁했다. 셔터 틈으로 그의 구두 끝만 보였다. 반들반들했다. 실밥 날리는 동네에선 눈에 띄는 구두다.큰어머니는 안 왔다. 아직 누워 있다고.언니가 휴대폰 사진을 작업대에 놓았다. 큰아버지가 봤다. 한참. 얼굴이 천천히 무너졌다."……이걸 미경이가.""응. 아빠 몰래."큰아버지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다리미 받침에서 김이 올라와 천장 쪽으로 흩어졌다. 풀 먹인 옷감 냄새가 났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아빠가 일어났다.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서랍 소리. 나왔다. 손에 파란 통장.통장이 작업대 위, 사진 옆에 놓였다."형. 이거 써.""……정호야.""채이 결혼 자금이야. 애 스무 살 때부터 부었어. 한 달에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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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화. 오십구 년 전 폐백실

[채이]할머니 전화는 일요일 저녁에 왔다. 그가 아니라 내 휴대폰으로."화요일에 혼자 와라. 점심 먹고 두 시. 버선 한 켤레 가져오고.""무슨 버선이요?""네 아비가 제일 잘 짓는 걸로."끊겼다. 할머니는 본론부터 말하고 본론에서 끊는다. 소파의 그가 서류에서 고개를 들었다."화요일에 혼자 오래요. 버선 들고."그가 서류를 내려놓았다."……할머니가 누굴 혼자 부르는 건, 좋은 일이거나 아주 안 좋은 일입니다. 저도 두 번 불려 가 봤습니다. 대학 합격했을 때, 부사장 됐을 때.""둘 다 좋은 일이잖아요.""합격했을 땐 세 시간 동안 경영학 원서를 읽으라고 하셨고, 부사장 됐을 땐 객실 청소를 일주일 시키셨습니다."입을 벌렸다. 그는 진지했다."한 켤레 말고 두 켤레 가져가세요. 그게 제일 안전합니다."[재헌]월요일 밤. 그녀가 식탁에 수첩을 펼쳤다. 상견례 때처럼."할머니 명단 주세요.""한 분인데요.""한 분이라도요."맞은편에 앉았다. 이 식탁에서 명단을 부르는 게 두 번째다. 우리 집 식탁은 회의실이 됐다. 나쁘지 않다. 원래 회의실보다 이쪽 회의가 더 잘 풀린다."찻잔을 드시면 대답 안 하신다는 뜻입니다. 기다리세요. 재촉하면 찻잔을 한 번 더 드십니다."그녀가 적었다. 찻잔 들면 기다림."찻잔을 내려놓으시면 결론입니다. 그 뒤로 하시는 말은 바뀌지 않습니다."찻잔 내려놓으면 결론. 밑줄 두 번."손을 보십니다. 얼굴보다 먼저. 당신 손은 이미 합격입니다. 실 감은 거 보셨으니까."그녀가 볼펜을 멈췄다."합격이요?""할머니가 누구 손을 두 번 보시는 건 처음 봤습니다. 식장에서 한 번, 대청마루에서 한 번."그녀가 자기 왼손을 내려다봤다. 흰 실 감은 반지. 실밥 하나 안 묻은 손인데, 한복집 손녀의 손이었다."……그럼 내일 저 뭐 하면 돼요?""들으시면 됩니다. 할머니는 할 얘기가 있을 때만 사람을 혼자 부르십니다."대학 합격 때도, 부사장 때도 할머니는 할 얘기가 있었다. 원서를 읽으라는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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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화. 예단 다듬이 백 번

[채이]토요일 새벽 다섯 시. 알람보다 먼저 눈을 떴다.서재 문이 열려 있었다. 아무도 없었다. 소파에도 부엌에도. 식탁 위에 호텔 메모지 한 장. 반듯한 글씨.[한복집에 갑니다. 아침 드시고 천천히 오세요. — 재헌]두 번 읽었다. 세 번째는 참으려다 읽었다. 세 번 읽어도 글자는 안 바뀌었다. 한복집. 새벽 다섯 시. 부사장."……미쳤나 봐."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했다. 아침은 안 먹었다. 천천히 오라는 말은 못 들은 걸로 했다.[재헌]새벽 네 시. 한복집 셔터 앞.셔터 밑으로 불빛. 재봉틀 소리. 두 번 두드렸다.셔터가 반쯤 올라갔다. 장인이 허리를 숙여 내다봤다. 돋보기, 앞치마, 가슴께에 바늘꽂이. 손에 인두. 나를 위아래로 봤다. 양복이 아니었다. 회색 티셔츠, 면바지, 걷은 소매."……뭐 하러 왔나.""다듬이질, 배우러 왔습니다. 혼주 한복 마감 철이라고 들었습니다."긴 침묵. 셔터가 끝까지 올라갔다."들어와. 앞치마는 저기. 채훈이 거다. 좀 짧을 거야."짧았다. 허리에서 끝났다. 가슴께 바늘꽂이에 바늘이 세 개 꽂혀 있었다. 장인은 그걸 보고 아무 말도 안 했다. 입꼬리가 한 번 씰룩했을 뿐."손 씻고. 거기 풀 먹여 말린 무명 걷어서 개."무명은 무거웠다. 풀 먹은 천이 손 안에서 서걱거렸다. 장인이 재봉틀을 돌렸다. 오래된 발틀. 대화가 불가능한 소리. 오히려 편했다. 할 말을 고를 시간이 생겼다.재봉틀이 멈추자 장인이 말했다."버선은 회장님이 마음에 들어 하시더냐.""그 땀이라고 하셨답니다."장인이 재봉틀 옆 달력을 봤다. 귀퉁이에 흑백 사진 한 장. 한복집 앞, 앞치마 두른 여자가 어린 남자아이 둘의 손을 잡고 있었다."우리 어머니다. 작은 게 나, 큰 게 형. 회장님이 예전에 복주머니 얘기 하셨지. 어머니 장례 때. 나는 흘려들었어. 한복집에 삯 안 받은 얘기가 한둘인가."장인이 다듬잇돌 위에 개어 둔 무명을 올렸다. 오늘 저녁에 나가는 예단 옷감이라고 했다. 풀 냄새가 확 올랐다. 장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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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화. 우천 시 실내 진행

[재헌]그날 밤 누룽지는 데우지 않았다.그녀가 봄빛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식탁에서 태블릿을 보고 있었다. 신발 벗는 소리에 태블릿을 뒤집었다. 그리고 다시 바로 놓았다. 숨기지 않기로 했으니까."채이 씨. 이리 와 보세요."그녀가 가방을 든 채 왔다. 화면을 보여 줬다. 안건 1호. 그 밑 작은 글씨.대표 후보 혼인의 진정성에 관한 자료.그녀가 두 번 읽었다."……진정성. 우리 결혼이 가짜라는 거죠. 그걸 증명하겠다는 거고.""그런 뜻입니다.""무슨 자료요?""모릅니다. 백 실장이 찾고 있습니다."그녀가 의자를 끌어 앉았다. 가방을 무릎에 올렸다."재헌 씨. 우리 결혼, 가짜예요?"그녀는 식탁만 봤다. 반지 낀 왼손을 오른손으로 덮은 채였다."……식은 진짜였습니다. 하객 이백 명 앞에서 했고, 서약도 했고, 반지도 끼웠습니다.""그다음은요.""그다음은."다듬이 방망이 소리 사이에 뱉은 말이 목까지 올라왔다. 1년이 짧습니다. 지금 하면 이사회 때문에 하는 말처럼 들릴 것이다. 진정성 자료를 막으려고 급하게 꺼낸 말처럼.삼켰다. 삼킨 말은 목에 걸린다. 마른 누룽지처럼."이사회 끝나고 말하겠습니다."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뭔가 말하려다 닫았다. 가방을 들고 일어섰다."알았어요. 잘 자요."방문이 닫혔다. 한참 식탁에 앉아 있었다. 버팀이를 봤다. 오늘은 아무도 물을 안 줬다. 일어나서 컵에 물을 받았다.[채이]그 주 내내 비가 왔다. 장마.그는 매일 늦었다. 백 실장, 법무팀, 사외이사들. 나는 장마철 예식을 치렀다. 비 오는 날 신부들은 밑단을 걱정하고 하객들은 우산 둘 데를 걱정한다. 로비에 우산꽂이를 세 개 더 놓고 버진로드 입구에 수건을 깔았다. 봄빛 매뉴얼에 있는 항목이다. 우천 시 실내 진행. 우리 홀은 원래 실내라서 그 항목은 우산꽂이 얘기뿐이다.우리는 새벽 두 시 부엌에서만 잠깐 마주쳤다. 누룽지는 데우지 않았다. 물만 마셨다. 그날 식탁의 대화가 조청처럼 끈적하게 남아 있었다.화요일, 자문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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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화. 체크아웃 전날

[채이]녹음은 삼 초였다. 1년만 해 주세요. 부부로.삼 초짜리 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빗소리가 들어올 자리가 없었다.그가 전화를 끊었다. 내 손은 아직 그의 손 안에 있었다. 방금 그가 실을 감아 준 반지가 그 안에 있었다. 빼지 않았다. 빼는 법을 또 잊었다."……진짜예요. 그 녹음."내가 먼저 말했다."우리 둘 다 알아요. 그날 그 말 했어요. 재헌 씨가 했고, 제가 좋다고 했어요. 말로만.""압니다.""종이는 남으면 증거가 된다고 했죠. 말도 남더라고요."그가 대답하지 않았다. 와이퍼가 두 번 왕복했다. 창에 빗물이 다시 덮였다."이사회에서 그 녹음을 틀 겁니다. 형이.""알아요.""그러면 나는 말할 겁니다. 처음엔 1년이었다고. 그리고.""하지 마요."그가 나를 봤다."지금 그 말 하면요, 다들 이렇게 들어요. 들켜서 급하게 하는 말. 대표 자리 지키려고 하는 말. 재헌 씨가 무슨 말을 해도 그 녹음보다 약해요. 녹음이 먼저 틀어지니까."예식장에서 배운 것. 먼저 튼 음악이 이긴다. 뒤에 트는 음악은 아무리 좋아도 사과처럼 들린다.그는 한참 말이 없었다. 손을 놓지 않은 채로."그럼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 있었다. 말하지 않았다. 그 대답은 그가 들으면 막을 대답이었다.[재헌]금요일. 22층. 백 실장이 칠판에 이름 일곱 개를 적었다. 이사 일곱 명."할머니는 의장이라 표결에 안 들어가십니다. 작은아버지, 형. 두 표는 확실히 저쪽. 사외이사 네 분 중 두 분은 형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녹음 들은 뒤로.""윤 이사님은.""모르겠다고 하십니다. 녹음 말고 다른 걸 보고 정하시겠다고.""그럼 나까지 셋, 저쪽 넷.""네."단추를 돌렸다. 흰 매듭. 다듬이질 백 번 한 팔이 아직 뻐근했다."부사장님.""응.""하채이 씨는 괜찮으십니까."백 실장이 사적인 걸 묻는 건 칠 년 만에 처음이었다. 칠판을 보던 눈을 돌렸다."……모르겠어. 요즘 너무 괜찮아 보여.""그게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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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화. 성혼 선언

[채이]새벽 다섯 시 사십 분. 한복집 셔터 밑으로 불빛이 새어 나왔다. 아빠는 이미 일어나 있었다. 아빠는 늘 이미 일어나 있다.캐리어를 끌고 들어가자 아빠가 인두를 든 채 나를 봤다. 캐리어를 봤다. 다시 나를 봤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벽에 걸린 앞치마 하나를 턱으로 가리켰다."손 씻고. 옷감 걷어."앞치마를 둘렀다. 가슴께 바늘꽂이에 바늘이 꽂혀 있었다. 풀 먹여 말린 무명을 걷었다. 무거웠다. 이 무게를 그 사람이 들었구나. 새벽 네 시에. 채훈이 앞치마를 두르고.재봉틀이 돌았다. 아빠의 오래된 발틀. 말을 할 수 없는 소리. 다행이었다. 할 말을 고를 시간이 생겼다. 고르다 보니 고를 게 없었다.재봉틀이 멈췄다. 아빠가 다듬잇돌 위에 무명을 폈다."아빠. 나 체크아웃했어.""……뭐?""그 집에서. 1년 약속, 내가 먼저 끝냈어. 오늘 이사회에서 녹음 튼대. 가짜 결혼이라고. 내가 없으면 그 녹음은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신부 두 번 도망간 불쌍한 신랑이 되는 거야. 그게 제일 나아."아빠가 다듬이 방망이를 들었다. 내리치지 않았다. 공중에서 멈췄다."그 사람이 여기서 다듬이질 백 번 할 때. 뭐라고 했는지 아냐.""……뭐라고 했는데."아빠가 방망이를 내려놓았다. 이 집 사람들은 싫으면 방망이를 내려놓는다. 아빠가 싫은 건 지금 나였다."내가 먼저 들은 거 너한테 말하지 말라고 했어. 네가 섭섭해할 거라고. 근데 말해야겠다."돋보기를 벗었다. 이마를 훔쳤다."1년이 짧다더라."옆에 달궈 둔 다리미가 김을 뿜었다. 앞이 흐려졌다. 김 때문이었다.뒷문이 열리고 엄마가 들어왔다. 내 캐리어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도망가는 건 세라 하나로 충분해."원장님이랑 똑같은 말이었다. 이 동네 어른들은 대본을 돌려 보는 모양이다."엄마, 나 도망 아니야. 체크아웃.""그게 그거야. 바보야."언니랑도 똑같았다. 대본이 확실하다.아빠가 방망이를 다시 들었다. 이번엔 내리쳤다. 탁."채이야. 너 식장에서 뭐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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