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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화. 갤러리 대관

[채이]시아버지가 커피를 다 마셨다. 빈 잔을 창가 책상에 내려놓았다. 메뉴판 옆. 스테이크 동그라미 두 개 옆."하나 부탁하겠소.""네.""네 시어머니를 만나고 가겠소. 열두 해 만에."나는 수첩을 꺼냈다. 버릇이다. 누가 누구를 만난다고 하면 수첩부터 나온다."자리를 좀 만들어 주겠소? 상견례를 이백 번 넘게 했다며. 반장이 그러더군."실 라인은 해외에서 온 사람한테도 닿는다."이백열세 번이요. 이번이 이백열네 번째예요.""상견례는 아니오. 이미 결혼한 두 사람이니까. 열두 해 동안 따로 살았을 뿐.""그럼 더 어려운 자리네요."시아버지가 처음으로 웃었다. 소리 없이. 눈만. 그 웃음을 알았다. 넉 달 동안 매일 봤으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닮았다. 아버지는 그걸 모를 것이다.[채이]그날 오후. 갤러리 서경에 전화했다. 관장님이 직접 받았다."어머님. 채이예요.""알아. 무슨 일이니.""아버님이 오셨어요. 1207호에 계세요. 어머님을 뵙고 가시겠대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붓 씻는 소리도 없었다. 아주 오래."……그 사람이 그러더냐.""네. 자리를 만들어 달라고 하셨어요. 제가요.""너는 왜 한다고 했니."대답은 짧게. 이 분한테는 정확하게."재헌 씨가 서른두 해 동안 어머님이 자기를 두고 가신 줄 알았대요. 어제 아버님한테 처음 들었어요. 어머님이 데려가려고 하셨다는 거. 갤러리 이층에 방까지 만드셨다는 거."숨소리가 멈췄다. 전화 너머에서."그래서 자리를 만들고 싶어요. 어머님이 그 방을 재헌 씨한테 보여 주실 수 있게요."긴 침묵. 그리고 관장님 목소리가 들렸다. 평소보다 반 박자 늦게."……수요일 저녁. 일곱 시. 이층에서.""음식은 제가 준비할게요. 아버님 좋아하시는 거 있으면 알려 주세요.""……그 사람은 겨울마다 발이 찼다. 삼십삼 년 전엔.""버선 있니.""하가네요.""그래. 그럼 됐다."끊겼다. 할머니 방식이었다. 이 집 여자들은 결론을 먼저 말하고 끊는다.[재헌]화요일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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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화. 연회 총괄

[재헌]목요일 아침. 형한테 문자를 보냈다.[1207호. 오늘 저녁. 스테이크 얘기.]답장은 한 시간 뒤에 왔다. 형은 늘 오 분 안에 답한다. 한 시간은 처음이었다.[월요일 이사회에서 보자.]그게 다였다. 도망 안 간다던 형이 이사회 뒤로 갔다. 1207호를 본 다음 날이었다. 여덟 살의 방. 크레파스 동그라미. 형아꺼.형은 그 방을 보고 무서워졌을 것이다. 무서우면 사람은 제일 익숙한 곳으로 숨는다. 형한테 제일 익숙한 곳은 숫자였다. 이사회, 안건, 표결.백 실장이 수첩을 폈다."월요일 이사회 표 계산입니다. 작은아버님, 전무님. 두 표. 사외이사 넷 중 윤 이사님은 부사장님 쪽. 두 분은 전무님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준비 부실이 이유입니다. 총주방장 이탈, 주방 인력 절반, 하우스키핑이 서빙.""하우스키핑 서빙이 왜 부실이지.""아마추어 잔치라는 말이 돌았습니다. 전무님 쪽에서."단추를 돌렸다. 아마추어. 여섯 명이 이십 년 동안 한 번도 박자를 안 놓친 노래를 불렀다. 그 사람들이 아마추어라면 이 호텔에 프로는 없다."나머지 한 분은.""아버님이십니다.""……아버지가 이사입니까.""해외 리조트 사장 자격으로 이사 명단에 계속 계셨습니다. 열두 해 동안 한 번도 안 나오셨고요. 월요일엔 나오신답니다."[채이]목요일 오후. 봄빛 원장실. 동네 법무사 할아버지가 왔다. 원장님 시어머니 때부터 봄빛 서류를 봐 준 분이라고 했다. 여든이 넘었다. 돋보기가 두 개였다. 하나는 쓰고 하나는 목에 걸고.시아버지 말을 전했다. 건물은 팔려도 이름은 안 팔린다. 등기부 볼 줄 아는 사람한테 물어보라.할아버지가 서류 뭉치를 넘겼다. 오래."건물은 도원개발 거 맞네. 땅이랑 건물. 잔금도 다 치렀고."원장님 어깨가 내려갔다."근데 이거."할아버지가 누런 종이 한 장을 꺼냈다. 목에 건 돋보기로 바꿔 썼다."봄빛웨딩홀. 이 이름. 삼십칠 년 전에 원장님 시어머님이 상호로 등록해 놓으셨네. 이건 건물이랑 따로야. 건물 산 사람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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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소등 후 예식장

[채이]월요일 밤. 식탁. 방 과장이 준 일정표를 그의 앞에 놓았다.그가 읽었다. 도원호텔 매각 검토에 관한 설명회. 주최 강태준 부회장. 10월 11일 오후 네 시. 삼층.단추가 멈췄다. 돌리다 만 채로."……연회 날. 같은 건물.""네.""낮 잔치에 할머니, 직원 가족, 봄빛 사람들이 와 있을 때. 삼층에서 이 호텔을 팔겠다고 기자들한테 말하겠다는 겁니다."목소리가 낮고 평평했다. 그 목소리. 신랑 대기실의 목소리. 탁자 건너편의 목소리."이건 탁자 건너편입니다. 우리 약속했습니다. 형이 안 멈추면.""알아요.""그럼.""하루만요."그가 나를 봤다."내일 하루만 주세요. 제가 전무님 만날게요. 그다음에도 안 멈추면, 그땐 같이 건너가요. 새끼손가락 건 대로.""……뭘 하려는 겁니까.""편지 배달이요."그가 한참 나를 봤다. 말 못 하는 그 하나. 두 달 동안 그는 한 번도 그걸 묻지 않았다. 오늘도 묻지 않았다. 대신 단추를 한 바퀴 마저 돌렸다."몇 시에.""밤 열 시. 봄빛.""그럼 나는 아홉 시 오십 분에 쓰레기통 옆에 있겠습니다."[채이]화요일 오후. 민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처음이었다. 번호는 방 과장이 줬다. 저장 이름을 뭐라고 할까 하다가 그냥 건물주, 라고 했다.[건물주님. 오늘 밤 열 시 봄빛웨딩홀 그랜드홀로 와 주세요. 건물 하자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세입자 드림.]답이 삼십 분 뒤에 왔다.[무슨 하자.][와 보시면 압니다. 혼자 오세요. 커피는 제가 준비할게요.]오 분 뒤.[알았어요.]단답이었다. 그 사람도 한 줄짜리 사람이 되어 가고 있었다.[재헌]화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께 전화했다."오늘 밤 채이 씨가 형을 만납니다. 봄빛에서.""알고 있다. 내가 보여 주라고 했다."두 달 동안 참았던 질문이 목까지 올라왔다. 이번엔 삼키지 않았다."……뭘 보여 줍니까."할머니가 찻잔을 드는 소리가 났다. 전화 너머로도 들렸다. 기다렸다."네 형이 먼저 봐야 할 것이다."찻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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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위약금 면제

[채이]왜 이걸 안 썼습니까.조명 하나 아래서 그가 물었다. 종이를 두 손으로 덮은 채.대답은 짧게. 이 사람한테는 그게 규칙이었다. 오늘 밤부터는 모르겠다."무기가 아니니까요.""……창고에서 그렇게 말했죠. 편지라고.""편지는 받을 사람한테만 가요. 다른 사람이 뜯으면 그건 편지가 아니라 증거가 돼요. 증거는 누굴 이기는 데 쓰고요."그가 버진로드를 봤다."하나 더 있어요.""뭔데요.""전무님이 벼랑 끝에 서 있는 거 봤어요. 창고에서. 벼랑 끝에 선 사람을 밀면 누굴 잡고 떨어져요. 전무님이 잡을 사람. 부회장님, 그리고 할머니."민혁의 손이 종이 위에서 움찔했다."할머니는 쉰다섯 해를 기다리셨어요. 전무님이 물어 오길. 그분이 떨어지는 건 싫었어요. 저희 할머니 바늘 몇 땀에 우신 분이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조명 아래 먼지가 떠다녔다. 예순한 해 된 홀의 먼지."……재헌이는 알아요? 이거.""아뇨. 말 안 했어요."그가 나를 돌아봤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남편한테도?""전무님 거라서요. 제 거가 아니라서. 재헌 씨는 두 달 동안 한 번도 안 물어봤어요. 말 못 하는 게 하나 생겼다고 했더니, 기다리겠다고 했어요."민혁이 웃었다. 젖은 얼굴로."……그 녀석이 기다린다고요. 1207호에서 룸서비스 삼십 분 늦으면 프런트에 세 번 전화하던 애가.""지금은 누룽지 데울 때 뚜껑 덮고 오 분 기다려요."민혁이 이번엔 소리 내서 웃었다. 코끝이 빨갰다. 삼십오 년 동안 안 울었다는 사람의 코였다."크레파스요."그가 말했다."빨간 거. 그거 아직 있었어요?""메뉴판에 동그라미가 두 개 있었어요. 빨간색으로. 형아꺼, 내꺼."민혁이 종이를 접어 안주머니에 넣었다. 왼쪽. 심장 위. 이 집 남자들은 중요한 걸 다 거기 넣는다.[재헌]밤 열한 시 십 분. 뒷문이 열렸다.형이 나왔다. 간판 불빛 아래. 눈이 빨갰다. 코도. 넥타이가 풀려 있었다.나를 봤다. 쓰레기통 옆의 나를.할머니 말. 아무것도 묻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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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화. 예비일 지정

[채이]"조건이요?"민혁이 원장님 찻잔을 내려놓았다. 두 손으로. 이 사람은 오늘 모든 걸 두 손으로 했다."토요일 연회. 식순에 제 순서 하나 넣어 주세요.""……무슨 순서요.""삼 분이요. 할머니 앞에서. 직접 말할 기회. 기자 없이, 이사 없이. 매니저님이 식순 짜시잖아요."매니저님. 제수씨가 아니었다.수첩을 폈다. 연회 식순. 낮 열두 시 개회, 할머니 인사말, 개관 연회 메뉴 소개, 봄빛 사진전, 직원 가족 소개, 복주머니 나눔. 빈칸이 없었다."식순은요, 원래 양가 합의가 필요해요. 신랑 측, 신부 측.""……농담이죠.""반은요. 반은 진짜예요. 할머니 인사말 앞에 넣을게요. 할머니가 말씀하시기 전에. 할머니가 대답하실 수 있게."민혁이 나를 봤다. 그리고 원장님을 봤다. 원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식순은 매니저 권한이다. 원장님이 오 년 전에 그렇게 정했다."삼 분이면 되겠어요?""……모르겠어요. 삼십 년 치 말이라.""그럼 사 분 드릴게요. 예비로 일 분."예식장에서는 늘 예비를 둔다. 예비일, 예비 부케, 예비 안전핀. 사람 말에도 예비 일 분이 필요하다.[재헌]수요일 오후 세 시. 할머니 전화. 이번엔 본론이 늦게 나왔다."재헌아.""네."오 초. 할머니가 오 초 넘게 말을 안 하는 건 드물다. 결혼식 날 이후 두 번째."네 작은아비가 왔다 갔다. 아침 일곱 시에. 혼자 운전해서.""……네. 형한테 들었습니다.""쉰다섯 해 만에 물었다. 어머니, 제 돌잔치를 하셨습니까."할머니 목소리가 흔들렸다. 두 번째로 듣는 흔들림."그래서 말해 줬다. 했다고. 영감 몰래 봄빛 작은 방에서. 내 혼례 치마를 뜯어 입혔다고. 한복집 새댁이 돌복 삯을 안 받았다고. 지갑에서 사진을 꺼내 줬다. 쉰다섯 해 만에 주인한테 갔다.""……작은아버지는요.""울더구나. 쉰여섯 살짜리가. 내 앞에서. 그리고 버선을 한 켤레 얻어 신고 갔다. 네 처가 두고 간 무명 버선. 발에 꼭 맞는다더라."전화 너머에서 찻잔 소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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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화. 실내 연회 전환

[재헌]목요일 밤 열한 시 오 분. 식탁. 그녀가 안전핀을 한 번 여닫은 뒤로 오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배치도만 봤다.나는 백 실장 흉내를 냈다. 수첩 대신 냅킨. 볼펜으로 적었다."뭐가 남아 있는지부터."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실내 공간. 그랜드볼룸. 밤 갈라 세팅이 금요일부터 들어갑니다. 형 쪽. 로즈룸, 백 명. 스카이라운지, 팔십 명. 로비, 서서 이백 명.""낮 잔치 하객이 몇이에요.""삼백 이십.""그럼 볼룸밖에 없어요.""볼룸은 형 겁니다. 밤 갈라. 샹들리에, 샴페인 타워, 외국 연주단. 금요일 오후부터 세팅."그녀가 배치도를 뒤집었다. 뒷면에 볼펜으로 선을 그었다. 시간표였다. 열두 시부터 세 시, 낮 잔치. 세 시부터 여섯 시, 전환. 일곱 시, 갈라."같은 방을 두 번 써요. 봄빛은 토요일마다 그랜드홀 하나로 식을 세 번 해요. 식 끝나면 사십 분 만에 꽃이랑 의자 다 바꿔요. 호텔은 세 시간이면 돼요.""형이 허락할까요.""물어봐야죠."그녀가 휴대폰을 들었다. 건물주, 라고 저장된 번호. 밤 열한 시 십 분.[채이]신호가 한 번 가고 받았다."매니저님.""전무님. 태풍이요.""봤어요. 지금 볼룸 배치도 보고 있었어요."이 사람도 안 자고 있었다. 형제가 같은 시간에 같은 배치도를 보고 있었다."낮 잔치를 볼룸으로 옮기고 싶어요. 열두 시부터 세 시까지.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전환하고, 일곱 시에 갈라. 갈라 세팅이 세 시간 늦어져요."전화 너머가 조용했다. 삼 초."……그래요.""그래요요?""샹들리에는 원래 늦게 켜는 거예요. 해 지고 나서. 낮에 켜면 촌스러워요."웃음이 났다. 그도 웃었다. 전화 너머로."갈라 세팅팀 금요일 출근 취소할게요. 토요일 세 시에 들어가라고 하고. 그리고 매니저님.""네.""전환 세 시간. 우리 팀 인력 다 쓰세요. 내 갈라 인력이지만 낮에도 쓰세요. 복주머니 나르게."전화를 끊었다.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냅킨을 든 채."……형이 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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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화. 사십 주년 기념 연회

[채이]"네, 할머니. 뭐든요."할머니가 지팡이 끝으로 볼룸 앞쪽을 가리켰다. 무대 옆. 식순상 민혁의 사 분이 있는 자리."오늘 민혁이가 말할 때. 내 옆에 서 있어라.""……네?""늙은이가 울면 누가 휴지를 줘야지. 소율이는 같이 울 거고, 재헌이는 단추만 돌릴 거다."할머니가 내 허리를 봤다. 남색 파우치. 반쯤 열린 지퍼."네 파우치에 있지? 휴지.""네. 있어요. 안전핀도 있어요.""안전핀은 네 거 해라. 휴지만 빌리자."옆에서 그가 헛기침을 했다. 단추를 돌리다 멈춘 손. 할머니 말이 정확했다.[채이]오전 열 시. 바람이 세졌다. 로비 회전문이 덜컹거렸다.방 과장이 한 시간마다 문자를 보냈다. 한 줄씩.[열 시. 풍속 초속 십이. 회전문 막습니다. 옆문 개방.][열한 시. 비 강해짐. 우산 백 개 옆문 비치. 지호 씨 배치.]지호가 옆문 앞에서 우산을 받아 꽂았다. 봄빛 우산꽂이 세 개를 준수가 트럭으로 가져왔다. 우천 시 실내 진행. 봄빛 매뉴얼이 호텔에서 일을 했다.열한 시 반부터 손님이 들어왔다. 하우스키핑 이순옥 님 가족. 손주 셋. 지호 어머니. 돌잡이 때 마이크 잡은 아들을 보고 웃었다. 봄빛 부부 스무 쌍. 흑백 사진을 들고. 휠체어 한 대. 요양원에서 모셔 온 할머니. 촛불 예식. 정전 이십 분. 신부가 제일 예뻤던 날.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사진 벽 앞으로 갔다. 자기 결혼사진 앞. 촛불 속 신부.휠체어의 할머니가 사진을 봤다. 오래. 할아버지를 못 알아본다던 할머니. 그러다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신부를 가리켰다."……나다."할아버지가 무릎을 꿇었다. 휠체어 옆에서. 울었다. 소리 없이. 이 나라 할아버지들은 다 소리 없이 운다.엄마 아빠가 옆문으로 들어왔다. 엄마는 한복. 아빠는 양복. 삼 센티 늘린. 비닐 뜯은 지 사흘 된. 실밥은 없었다. 엄마가 옆문 앞에서 한 번 더 떼 줬다. 아빠가 옆문 앞에서 서성였다. 호텔 볼룸에 들어가도 되나 하는 얼굴.그가 옆문으로 걸어갔다. 아빠 앞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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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화. 청첩장 재인쇄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볼룸. 갈라가 끝났다.샹들리에는 일곱 시에 켜졌다. 전무님 말대로 해가 지고 나서. 흰 테이블보가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들꽃 옆에 장미가 섰다. 외국 연주단, 샴페인 타워. 투자자와 외신. 민혁이 무대에서 영어로 인사했다. 마지막 한 문장만 한국어였다. 이 호텔은 복주머니 삼백 개로 시작했습니다.외신 기자가 그 문장을 통역해 달라고 했다. 방 과장이 했다. 복주머니를 뭐라고 번역했는지는 모른다.나는 볼룸 구석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구두를 벗고. 발이 퉁퉁 부었다. 하루에 잔치 두 번. 예식장 매니저 오 년에도 이런 날은 없었다.그가 옆에 앉았다. 넥타이를 풀고. 나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댔다. 이제 묻지 않고 댄다."할머니가 정하셨어요. 결혼식 다시.""네.""할머니가 정하시면 끝이잖아요. 찻잔 내려놓으셨으니까."그가 한참 말이 없었다. 단추를 한 바퀴 돌렸다."……식장은 할머니가 정하십니다. 늘 그러셨죠.""네.""청혼은 제가 정합니다."머리를 들었다. 그를 봤다. 그는 볼룸 천장의 샹들리에를 보고 있었다. 모르는 척하는 옆얼굴. 귀 끝이 빨갰다.목요일부터 숨기던 그것. 일요일까지만이라던 그것.내일이 일요일이었다.[채이]일요일. 봄빛. 은비가 이상했다."채이야, 연회 뒷정리 우리 홀도 해야 돼. 호텔에서 빌려 온 우산꽂이 세 개 닦아야 되고, 사진 벽 액자 틀 다시 가져와야 되고, 장부 정리도.""은비야. 장부 정리는 원장님이 하시잖아.""오늘은 네가 도와드려야 돼. 원장님이 허리 아프시대."원장님은 원장실에서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계셨다. 장부를 펼친 채. 볼펜을 쥔 채. 내가 들어가자 장부를 덮었다. 또.준수는 안 보였다. 음향실 문이 잠겨 있었다. 탁 실장님은 주방에서 뭔가를 굽고 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났다. 누룽지 굽는 냄새. 엄마 누룽지. 봄빛 주방에서 누룽지를 굽는 건 처음이었다.폐백 이모님이 폐백실 문을 반만 열고 나를 봤다. 그리고 닫았다.여섯 시. 일곱 시. 은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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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화. 신부대기실 사용 중

[채이]일곱 달은 생각보다 짧았다. 예식장 사람한테 일곱 달은 식 백 건이다. 백 건을 치르고 나니 오월이었다.십일월, 은비가 봄빛에서 결혼했다. 도경 씨가 찍은 신부 삼백 명 중 백이십 명이 왔다. 부케는 약속대로 정조준이었다. 이번엔 피하지 않았다. 무전기를 옆구리에 끼고 두 손으로 받았다. 은비가 버진로드 위에서 만세를 불렀다.십이월 스무날, 봄빛 부부의 날. 사진 벽이 이백십 장으로 늘었다. 백 쌍 넘게 왔다. 촛불 예식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왔다. 할머니는 그날도 사진 속 신부를 가리키며 나다, 라고 했다. 그리고 할아버지 손을 잡았다. 처음이라고 했다. 요양원에 들어간 뒤로.그날 원장님이 등기부 한 장을 로비 사진 벽 한가운데 꽂았다. 할머니 결혼사진 바로 밑에. 건물주 변정숙. 삼십 년 할부. 첫 회는 복주머니로 갚았다. 민혁이 받아 갔다. 엄마가 자투리 비단으로 지은 복주머니 하나. 영수증에 바느질삯이라고 적어서.일월, 신혼여행. 제주. 진우 씨 공방이 있던 마을. 백 실장님이 방을 두 개 잡았다. 제주 펜션 사건 이후 백 실장님의 신조가 됐다고 했다. 부부 출장에도 방은 두 개. 우리는 하나만 썼다. 나머지 하나는 사흘 내내 비어 있었다. 백 실장님은 청구서를 보고 수첩에 한 줄을 적었다고 했다. 안 보여 줬다.삼월, 버팀이에 봉오리가 올라왔다. 이번엔 제철이었다. 두 사람이 물을 주는데도 헷갈리지 않았다. 봄인 줄 제대로 알았다.그리고 오월. 셋째 토요일.[채이]오전 열 시. 봄빛 신부대기실.문고리를 잡으려다 멈췄다. 안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은비였다."신부님. 들어오세요. 매니저가 문 열어 드릴게요."문이 안에서 열렸다. 은비가 서 있었다. 검정 정장. 허리에 무전기. 가슴에 명찰. 봄빛웨딩홀 매니저 고은비. 그리고 허리에, 남색 파우치.내 파우치였다."그거 내 거야.""오늘은 내 거야. 너 신부야. 신부는 파우치 안 차.""은비야, 지퍼 반쯤 고장 났어. 손으로 벌려야 돼.""알아. 오 년 동안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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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화. 성혼 선언, 두 번째

[채이]문이 열렸다.길은 길었다. 열두 걸음씩 두 번. 열두 달 전과 같은 길이. 그런데 이번엔 다 보였다. 면사포가 한 겹이라서. 보고 싶어서.앞줄에 할머니. 지팡이를 무릎에 눕히고. 그 옆에 부회장님과 작은어머님. 그 옆에 아버님과 관장님. 나란히. 같은 쪽을 보며. 좌석 배치는 내가 짜지 않았다. 은비가 짰다. 오 년 동안 옆에서 보더니 똑같이 짰다.두 번째 줄에 전무님. 빨간 크레파스를 준 사람. 방 과장님이 옆에 있었다. 이어폰 없이. 휴대폰도 없이. 두 손을 무릎에 올리고.반장님과 하우스키핑 여섯 명. 연분홍, 하늘색, 연두색 한복. 유니폼 아닌 날. 지호가 벨보이 모자를 쓰고 왔다. 벗으라고 했는데 안 벗었다고 은비가 전했다.윤 여사님. 엄 셰프. 탁 실장님과 폐백 이모님. 언니와 진우 씨. 큰아버지와 큰어머니. 채훈. 소율. 백 실장님은 맨 끝자리에 수첩을 펴고.그리고 뒤쪽 벽 가까이. 휠체어 한 대. 촛불 예식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 옆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 잠옷 대신 양복. 조끼는 그대로. 강원도 농장 주인이었다. 새벽에 은방울꽃을 직접 들고 왔다고 했다. 제철 꽃. 오월 은방울꽃.내 손에 그 꽃이 있었다. 부케. 흰 리본. 매듭 한쪽 고리가 더 컸다. 오늘 아침 그가 묶었다. 세 번 풀었다 묶었다고 했다. 다시 묶지 않았다.아빠가 팔에 힘을 줬다. 작게 속삭였다."천천히. 우리 딸 넘어지면.""가게 옷 다 뜯는다며.""……오늘은 안 뜯는다. 오늘 입은 옷이 다 우리 집 옷이야."웃음이 터질 뻔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앞치마 끈이 아빠 양복 밑에서 흔들렸다.[재헌]길 끝에 섰다. 기다렸다. 신랑은 기다린다. 이번엔 제대로.그녀가 걸어왔다. 앞치마 끈이 흔들리는 장인어른 팔을 잡고. 면사포 한 겹 너머로 그녀 얼굴이 보였다. 웃음을 참는 얼굴. 입술을 깨문.장인어른이 내 앞에 섰다. 고개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 열두 달 전엔 내가 먼저 숙였다. 오늘은 동시였다.장인어른이 그녀 손을 내 손 위에 올렸다.떨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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