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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신혼여행 없음

[채이]금요일 저녁 일곱 시. 캐리어를 끌고 31층으로 돌아왔다. 체크아웃 열네 시간 만의 재입실. 호텔이었으면 위약금 대신 사과문을 받았을 것이다.현관문을 열자 집이 그대로였다. 회색 소파, 유리 탁자, 통유리. 그런데 달라져 있었다. 뭐가 다른지 한참 봤다.버팀이 화분 받침에 물이 고여 있었다."……물 얼마나 줬어요."뒤에서 들어오던 그가 멈췄다."어제 반 컵. 오늘 아침 반의반 컵.""이틀에 한 번이라고 했잖아요.""메모는 오늘 아침에 읽었습니다. 어제는 몰랐습니다.""어제는 왜 줬는데요."그가 대답하지 않았다. 신발을 벗었다. 넥타이를 풀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지도 않고 서재에 가지도 않고 거실 한가운데 서 있었다. 어디 서야 할지 모르는 사람처럼. 한복집 옷감 두루마리 옆에서처럼."……불안하면 물을 줍니다. 요즘 알았습니다."웃음이 터졌다. 받침에 고인 물을 휴지로 찍어 냈다. 버팀이는 멀쩡했다. 올리브나무는 물을 좀 많이 먹어도 버틴다. 이름값을 한다.저녁은 탁 실장님 반찬통이었다. 원장님이 은비 편에 보냈다. 반찬통 뚜껑에 매직으로 한 줄. 돌아왔으면 밥부터.식탁에 마주 앉았다. 오늘은 기본 세팅이 없었다. 그가 젓가락 두 벌만 놓았다. 배우는 사람이다.밥을 먹다가 그가 말했다."방은.""……네.""따로입니다. 아직."아직, 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밥알이 목에 걸렸다. 물을 마셨다. 그가 물잔을 내 쪽으로 밀어 줬다. 나이프 끝 위쪽 대각선 자리로. 기본 세팅은 몸에 남는다.[재헌]주말 내내 그녀 이름을 불렀다. 이번엔 연습이 아니었다. 부를 이유가 없을 때도 불렀다. 이유가 없는 게 이유였다.일요일 오후, 할머니 전화."신혼여행은 어디로 가느냐.""……안 갑니다. 연회 준비가.""그래. 연회 끝나고 가라. 그 전에 가면 네 형이 그 틈에 뭘 할지 모른다."할머니는 늘 반만 말하고 끊는다. 이번엔 한마디 더 했다."그리고 재헌아. 네 방 서재 소파가 작다고 소율이가 그러더구나.""……소율이가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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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화. 대관 종료 통보

[채이]"우리가 세 들어 사는 줄은 알았지?"원장님이 물었다. 몰랐다. 오 년 동안 이 건물이 봄빛 건 줄 알았다. 간판이 예순한 해를 버텼으니까. 간판 주인이 건물 주인인 줄 알았다."삼층짜리 이 건물. 우리 시어머니가 처음 세를 얻었어. 그때 주인은 쌀가게 하던 영감님. 그 영감님 아들이 물려받았고, 그 아들이 이번에 판대. 나이가 들어서 정리한다고.""임대 계약은요.""올해 12월 말까지.""그다음은요."원장님이 봉투를 봤다. 도원개발."새 주인이 정하겠지."나는 도원개발이 누구 담당인지 몰랐다. 그날 밤 알았다.[재헌]"작은아버지 라인입니다. 실무는 형이 봅니다."그녀가 식탁에서 봉투를 내려다봤다. 반찬통 옆에 서류 봉투. 우리 식탁엔 이제 별게 다 올라온다."역 앞 재개발 구역에 걸쳐 있습니다. 봄빛 자리가 모서리입니다. 형이 이 년 전부터 그 블록을 모으고 있었어요. 봄빛 건물이 마지막 조각입니다.""우연이에요?""반은요. 모으던 건 원래 계획입니다. 지금 산 건 계획이 아닙니다. 시기가."그녀가 봉투를 덮었다. 손바닥으로.단추를 돌렸다. 한 바퀴. 말할 준비."내가 사겠습니다.""……네?""개인 돈으로. 도원개발보다 높게. 원래 주인한테 직접. 아직 잔금 전이면 가능합니다.""안 돼요."빨랐다. 우리 둘 사이에서 안 돼요, 는 늘 빠르다."당신 돈 말고요.""왜입니까.""재헌 씨 돈으로 사면요, 봄빛은 그날부터 부사장 부인 예식장이에요. 원장님은 평생 재헌 씨한테 월세 내는 사람이 되고요. 원장님은 그거 못 견뎌요. 예순한 해 동안 누구한테 신세 진 적 없는 홀이에요.""……""그리고 전무님이 돈으로 산 걸 재헌 씨가 돈으로 다시 사면, 그건 두 형제가 돈으로 싸우는 거예요. 봄빛은 그 사이에 낀 물건이 되고요."맞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 제일 불편하다."그럼 뭘로 지킵니까.""봄빛 걸로요.""봄빛 거가 뭡니까."그녀가 대답하지 못했다. 아직 모르는 얼굴이었다. 모르는데 안 된다고 하는 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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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화. 예약 장부

[재헌]토요일 밤 아홉 시 반. 봄빛 지하.버려도 되는 옷을 입고 왔다. 회색 티셔츠, 트레이닝 바지. 그리고 앞치마. 채훈 이름에 줄 두 개, 강 한 글자.그녀가 나를 보고 웃음을 참았다. 은비 씨는 참지 않았다. 준수 씨는 휴대폰을 들었다가 그녀 눈빛에 내렸다.창고 문이 열리자 먼지가 한꺼번에 일어났다. 형광등 두 개 중 하나만 켜졌다. 철제 선반 네 줄. 선반마다 누런 상자. 상자마다 매직 글씨. 연도 대신 권수가 적혀 있었다. 1권부터 예순한 권.재채기가 나왔다. 세 번."그러니까 버려도 되는 옷 입고 오랬잖아요.""입었습니다.""코는 못 버리잖아요."탁 실장님이 김밥 네 줄을 들고 내려왔다. 폐백 이모님이 보리차 주전자. 은비 씨가 신문지를 바닥에 깔았다. 창고 한가운데 소풍 자리가 생겼다."먼저 먹고 해. 먼지 먹기 전에 김밥 먹어."탁 실장님 말에 다들 신문지에 앉았다. 나도 앉았다. 도원그룹 부사장이 예식장 지하 창고 신문지 위에서 김밥을 먹는다. 기자들이 알면 제목을 뭐라고 뽑을지 잠깐 생각했다. 실 라인이 막아 줄 것이다.김밥은 계란이 두꺼웠다. 맛있었다."실장님, 이거 봄빛 메뉴입니까.""아니. 우리 집 메뉴. 마누라가 쌌어."폐백 이모님이 보리차를 따르며 한마디 했다."도망갔다 돌아와서 제일 먼저 싼 게 이 김밥이야. 탁 씨가 계란 두껍게 좋아하거든."탁 실장님이 헛기침을 했다. 이십 년 된 부부의 한 줄짜리 고백을 김밥과 같이 삼켰다.[채이]열 시. 원장님이 계단 위에서 내려다봤다. 내려오지는 않았다. 무릎이 안 좋아서 지하 계단은 못 내려오신다."맨 앞 스무 권은 우리 시어머니 거야. 조심해서 넘겨.""시어머님이 원장이셨죠.""그래. 그 양반이 장부를 그렇게 썼어. 식 끝나면 밤에 불 켜 놓고 한 줄씩. 신부 이름 옆에 뭐든 하나씩 적었어. 울었는지, 웃었는지, 뭘 먹었는지. 내가 시집와서 물었지. 어머니, 그런 걸 왜 적어요. 돈 받은 거만 적으면 되지.""뭐라고 하셨어요.""돈은 은행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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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화. 비공개 하객

[재헌]새벽 한 시 오십 분. 창고 문을 열었다. 커피 두 잔.그녀가 신문지 위에 앉아 있었다. 장부를 무릎에 덮고. 얼굴이 하얬다. 먼지 때문이 아니었다."무슨 일 있습니까."그녀가 나를 봤다. 입을 열었다가 닫았다. 다시 열었다."……나중에 말할게요. 지금은 못 해요.""네.""거짓말은 아니에요. 말을 못 하는 거예요. 제 거가 아니라서.""압니다."커피를 건넸다. 블랙, 진하게. 그녀가 두 손으로 받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창고가 추운 건 아니었다. 팔월이다.장부 표지가 보였다. 7권. 그녀가 그걸 안 보이게 돌려놓지 않았다. 숨기지도 않고 보여 주지도 않았다. 그 중간이 그녀 방식이었다. 거짓말은 안 하고, 남의 비밀은 지킨다.기다리기로 했다. 할머니한테 배운 게 하나 있다면 그거다. 찻잔을 들면 기다린다.휴대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보여 줬다."이건 돈 아닙니다."꺼진 간판. 봄 자 받침. 까맣게 탄 전구 하나."전구입니다. 규격 찍어 왔습니다."그녀가 화면을 보다가 웃었다. 힘없는 웃음이었다. 그래도 웃음이었다."……전구는 돼요."[채이]일요일 아침. 봄빛 사무실 복사기. 7권 그 페이지를 한 장 복사했다. 딱 한 장. 원본은 상자에 도로 넣었다. 7권, 네 번째 줄 선반, 왼쪽 끝.복사본을 봉투에 넣었다. 봉투에 아무것도 쓰지 않았다. 호박죽처럼.누구 거냐고 스스로 물었다. 이 한 줄은 누구 거지.할머니 거다. 쉰다섯 해 전에 우신 분.부회장님 거다. 돌잔치의 아기.민혁 거다. 우린 어차피 둘째잖아요, 라고 말한 사람.내 거는 아니다. 우리 할머니 글씨라서 조금은 내 거 같았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했다. 내 거 같은 남의 것이 제일 위험하다. 예식장에서 배웠다. 신부 부케는 매니저가 제일 많이 만지지만 매니저 게 아니다.[채이]월요일. 봄빛 부부 찾기 첫날.준수가 밤새 만든 글을 올렸다. 봄빛웨딩홀 예순한 해. 12월 31일, 이 홀의 마지막 날 전에 한 번 와 주세요. 그날의 사진을 들고. 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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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화. 객실 이동

[채이]"못 드려요."짧게. 이 사람한테는 그게 규칙이다.민혁이 웃었다. 오늘 웃음은 끝이 갈라져 있었다."뭘 쥐고 있는지 알아요, 제수씨. 우리 아버지 얘기죠. 둘째 집 얘기. 그거 할머니가 줬어요? 그걸로 날 치라고?"창고 형광등이 한 번 깜빡였다. 간판은 고쳤는데 여긴 아직이다."아무도 누굴 치라고 안 줬어요.""그럼 왜 할머니 앞에서 울렸어요. 쉰다섯 해 동안 한 번도 안 우신 분을.""그건 제가 말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그럼 누가 말할 수 있는데요.""할머니요."민혁이 입을 다물었다."이건 전무님 거예요. 그런데 제가 드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할머니께 여쭤보세요. 할머니는 기다리고 계세요. 전무님이, 아니면 부회장님이 묻기를.""기다려요? 쉰다섯 해를?""네."민혁이 뭔가 말하려다 삼켰다. 그 표정을 안다. 상견례 때 작은아버지가 할머니한테 이름 불리고 말을 삼키던 얼굴. 부자가 닮았다. 말을 삼키는 버릇까지. 식탁 끝자리에 오래 앉으면 그렇게 되는 모양이다."쓰고 싶으면 써요, 제수씨. 이사회에서든 기자한테든."민혁이 돌아섰다."대신 봄빛은 12월 31일이에요. 그건 안 바뀌어요."구두 소리가 계단 위로 멀어졌다. 방 과장이 따라가다 문간에서 멈췄다. 나를 한 번 봤다. 뭔가 말하려는 얼굴. 흰 이어폰을 만졌다. 그리고 올라갔다.[재헌]금요일 밤. 식탁."전무님이 창고에 왔어요."그녀가 말했다. 반찬통 뚜껑을 열면서."뭘 달라고 했어요. 안 줬어요. 그 뭐가, 제가 말 못 하는 그거예요."숟가락을 내려놓았다."형이 협박했습니까.""아뇨."그녀가 반찬통을 내 쪽으로 밀었다. 탁 실장님 멸치볶음."무서워했어요. 전무님이.""……형이요.""네. 쓰고 싶으면 쓰라고 했는데, 제발 쓰지 말라는 얼굴이었어요. 예식장에서 그런 얼굴 많이 봐요. 신부 아버지가 축사 원고 잃어버렸을 때. 괜찮다고 하면서 제일 안 괜찮은 얼굴."형이 무서워하는 걸 본 적이 없다. 삼십이 년 동안. 1207호에서 스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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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화. 꽃장식 교체

[채이]짐 옮겨도 됩니까.조청 종지를 들고 있던 손이 멈췄다. 종지 안에서 조청이 천천히 기울었다. 조청은 천천히 기운다. 나는 그보다 빨리 기울었다."……짐이 몇 개인데요."그가 대답을 준비해 온 사람처럼 말했다."셔츠 열두 장. 넥타이 여덟 개. 책 몇 권. 앞치마 하나.""앞치마도요?""채훈 씨 거. 강, 이라고 적힌.""버팀이는요.""버팀이는 거실에. 거기가 제일 해가 잘 듭니다."이 사람은 이사 계획서까지 머릿속에 써 왔다. 한 줄짜리가 아니라 목록으로."소파는요.""……두고 가겠습니다."웃음이 새어 나왔다. 조청 종지를 내려놓았다. 안전핀을 열려다 그가 보는 걸 알고 말았다."소파는 두고 오세요. 손님 오면 써요. 제주 소파요."그가 웃었다. 입까지.그날 밤 셔츠 열두 장이 내 방 옷장으로 왔다. 넥타이 여덟 개는 서랍 한 칸. 앞치마는 문고리에 걸렸다. 베개가 하나 더 생겼다. 서재에서 온 베개. 호텔 베개다. 너무 푹신했다.불을 껐다. 침대가 넓었다. 원래 넓었는데 오늘 처음 그걸 알았다. 그가 반대편 끝에 누웠다. 반대편 끝이 조금 기울었다.오 분 뒤 그의 숨소리가 바뀌었다. 느려지고 깊어졌다.잠들었다. 오 분 만에. 석 달 동안 새벽 두 시까지 누룽지를 데우던 사람이.나는 한참 천장을 봤다. 그의 숨소리를 셌다. 입장 신호처럼. 셋, 둘, 하나. 그러다 나도 모르게 잠들었다. 몇까지 셌는지 모른다.[재헌]눈을 떴다. 창밖이 밝았다. 시계를 봤다. 아침 일곱 시 십 분.잤다. 일곱 시간. 1207호를 나온 뒤로 처음이다.천장이 낯설었다. 고개를 돌렸다. 의자 등받이에 그녀 카디건이 걸려 있었다. 어제 입은 것. 탁자 위에 봄빛 수첩, 누룽지 봉지 하나, 안전핀 한 줌, 반쯤 남은 물컵. 바닥에 그녀 슬리퍼 한 짝. 나머지 한 짝은 침대 밑 어딘가.아무도 치우지 않았다. 어제가 그대로 있었다.어제가 남아 있는 방.움직이지 않았다. 옆에서 그녀가 자고 있었다. 이불을 턱까지 끌어올리고, 머리카락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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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화. 주방장 부재

[재헌]목요일 오후 세 시. 연경 주방.주방이 조용했다. 오후 세 시 주방은 원래 저녁 준비로 시끄럽다. 오늘은 칼 소리만 났다. 한 사람 몫.총주방장 자리. 스테인리스 책상 위가 비어 있었다. 모니터는 있는데 본체 연결선이 뽑혀 있었다. 서랍이 반쯤 열려 있었다. 안에 아무것도 없었다. 사십 년 치 레시피가 들어 있던 서랍.엄하늘 부주방장이 그 책상 옆 도마 앞에 서 있었다. 파를 썰고 있었다. 일정하게. 저녁 영업은 해야 하니까."엄 셰프."칼이 멈췄다."할 수 있습니까. 연회."그가 나를 봤다. 삼 초."네."한 음절. 우산 밑에서의 나처럼."레시피가 없는데.""낮 잔치 메뉴는 회장님이 불러 주신 대로 할 수 있습니다. 맛이 문제입니다. 사십 년 전 맛. 그건 파일에도 없었을 겁니다."그리고 다시 파를 썰었다. 한 줄 더 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백 실장이 수첩을 폈다."확인했습니다. 총주방장님이 옮겨 가시는 호텔, 투자사 중 한 곳이 도원개발과 같은 펀드입니다. 그리고 지난 삼 주 동안 방준기 과장이 점심때 두 번 동행했습니다."형이다. 또.22층 버튼 옆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전무실 층. 누르면 형 앞이다. 그녀 목소리가 들렸다. 식장에서 사고 나면 소리 지르기 전에 뭐가 남아 있는지부터.누르지 않았다. 내 사무실 층을 눌렀다."백 실장. 오늘 연경 주방에 뭐가 남아 있는지 목록 줘. 사람까지."[채이]목요일 밤. 식탁. 그가 목록을 펼쳤다. 백 실장님 글씨. 한 줄짜리가 스무 줄.주방 인력 열둘 중 넷 이탈. 레시피 파일 전량 반출. 개관 연회 메뉴 기록 없음. 남은 인력 여덟. 엄하늘."레시피는 파일에만 있는 게 아니에요."내가 말했다. 반찬통 뚜껑을 열면서. 탁 실장님 갈비찜이었다."사람한테 있어요."그가 갈비찜을 봤다. 나를 봤다."……이 갈비찜 말입니까.""탁 실장님 갈비찜은 봄빛 명물이에요. 근데 탁 실장님이 이거 누구한테 배웠는지 저도 몰라요. 오 년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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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화. 부케 받는 사람

[채이]수요일. 봄빛 드레스실. 언니 가봉.드레스는 언니가 직접 골랐다. 어깨가 드러나지 않는 단순한 옷. 진우 씨 공방 나무색이랑 어울리는 상아색. 입자마자 드레스 이모님이 허리에 손을 넣어 봤다. 손가락 하나도 안 들어갔다."딱이네.""네 치수로 맞춘 거니까."나는 언니 등 뒤에서 지퍼를 올렸다. 끝까지. 걸리는 데 없이.언니가 거울 속의 나를 봤다."너 그날 가봉 없이 입었지. 내 드레스.""응.""등 뒤 떴었어?""손가락 세 개.""……미안.""안전핀 일곱 개가 버텼어."언니가 웃었다. 이번엔 울지 않았다. 대신 거울 속 내 손을 잡았다."이번엔 네가 입장 신호 줘. 삼, 이, 일. 그거 들어야 걸을 수 있을 것 같아.""매니저가 원래 그거 하는 사람이야.""알아. 그래서 너한테 맡긴 거야."[재헌]토요일. 서진우 씨가 호텔로 왔다. 약속 없이. 로비에서 지호 씨가 연락했다. 부사장님, 키 큰 분이 나무 상자 들고 찾으세요.라운지 창가에 앉았다. 서진우 씨가 탁자 위에 작은 상자를 내려놓았다. 손바닥만 한 나무 상자. 뚜껑에 꽃이 새겨져 있었다. 수국이 아니었다. 작은 종 모양 꽃이 한 줄로.은방울꽃."……이건.""세라 반지 상자 만들다가 남은 나무로요. 부사장님도 필요하실 것 같아서."말이 느렸다. 한 박자 쉬고."공방 마당에서 판자 옮기실 때. 그 사람 얘기 들으면 먼저 웃는다고 하셨잖아요. 우는 건 아직이라고.""……기억하십니까.""나무 깎는 사람은 들은 걸 오래 씹어요."상자를 열었다. 안에 홈이 파여 있었다. 반지 하나 들어갈 크기. 바닥에 작은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너무 작아서 창가 빛에 기울여야 보였다.두 번째."첫 번째는 식장에서 급하게 하셨으니까. 두 번째는 제대로 하시라고."상자를 닫았다. 손바닥에 올려놓고 한참 봤다. 은방울꽃이 손금 위에 있었다."값을.""꽃값 대신 사진 달라던 농장 분 얘기 들었어요. 저도 그걸로 할게요. 그 상자 여는 사진."서진우 씨가 일어섰다. 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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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화. 좌석 배치 변경

[채이]토요일 밤 열한 시. 식탁. 휴대폰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캡처 두 장.그가 읽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는 읽지 않았다. 그도 이제 안다. 세 번 읽어도 글자는 안 바뀐다.표정이 없었다. 커프스 단추도 돌리지 않았다. 손을 탁자 위에 가만히 올려놓고 있었다. 제주 펜션 창가에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던 그 얼굴."……형 번호입니다.""네.""방 과장이 열두 시 십 분에 계단 문. 표는 봉투에."그가 캡처를 한 번 더 넘겼다. 비행기표 사진. 오후 세 시 사십 분."이걸로 끝낼 수 있습니다."목소리가 낮고 평평했다. 결혼식 날 신랑 대기실의 목소리. 넉 달 동안 못 들었던 목소리."이사회에 올리면 형은 전무 자리 내놔야 합니다. 기자한테 주면 형 이름으로 기사가 백 개 납니다. 봄빛 매입도 멈출 수 있습니다. 여론이 있으니까.""……""형은 당신 식장을 무너뜨리려 했습니다. 당신 홀을 샀고, 주방장을 빼 갔습니다. 봄빛은 12월 31일입니다."전부 맞는 말이었다. 맞는 말이 제일 무섭다.[재헌]그녀가 한참 말이 없었다. 반찬통 뚜껑을 열었다 닫았다. 탁 실장님 멸치볶음."재헌 씨. 예식장에서 제일 큰 싸움이 언제 나는지 알아요?""……모릅니다.""신부 아버지가 모욕당했을 때요. 상견례에서든 식장에서든. 누가 신부 아버지 체면을 하객들 앞에서 깎으면, 그 집은 축사 대신 싸움을 해요. 식 끝나도 안 끝나요. 이십 년 가요.""형은 신부 아버지가 아닙니다.""전무님은 지금 벼랑 끝에 선 사람이에요. 제가 창고에서 봤어요. 무서워하는 얼굴. 벼랑 끝에 선 사람을 사람들 앞에서 밀면요, 떨어지면서 누굴 잡고 떨어져요. 옆에 있는 사람. 부회장님, 작은어머님, 방 과장님. 그리고 할머니."할머니. 그 단어에서 그녀가 한 박자 멈췄다. 말 못 하는 그 하나가 거기 있었다."그럼 어떻게 하자는 겁니까.""좌석 배치를 바꿔요.""……좌석 배치.""상견례 때 사이 안 좋은 사돈을 마주 앉히면 싸워요. 옆에 앉히면 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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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화. 1207호 원상 복구

[재헌]"이유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로비 한가운데. 지나가는 투숙객들이 우리를 흘끗 봤다. 부자가 서서 결혼 반대 얘기를 하는 장면. 호텔 로비에서 흔하지 않다.아버지가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급하게 한 결혼은 급하게 끝난다.""……""나랑 네 엄마처럼. 할머니가 정한 결혼이었지. 선 세 번 보고. 너도 세 번 봤다더구나, 원래 신부를. 그러고 식장에서 신부가 바뀌었다. 더 급하게."아버지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열두 해 동안 전화로만 듣던 목소리. 전화로 들을 때보다 덜 차가웠다. 얼굴이 붙어 있으니까."제 결혼은 할머니가 정한 게 아닙니다.""그럼.""식장만 정하셨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정했습니다. 식장에서. 사십 분 만에."아버지가 나를 봤다. 오래. 그리고 가방을 다시 들었다."방은 1207호로 줘라. 여기 있는 동안."심장이 한 번 멈췄다. 1207호. 아홉 시에 형이 오기로 한 방."……다른 방도 있습니다. 스위트가.""1207호."아버지는 말을 바꾸지 않았다. 할머니 아들이다.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가는 아버지 뒷모습을 보며 휴대폰을 꺼냈다. 형한테 문자.[아홉 시 미룹니다. 아버지가 오셨습니다. 1207호로.]답장이 바로 왔다.[알아. 나도 로비 이층에서 봤어. 큰아버지 늙으셨네.]그리고 한 줄 더.[스테이크 얘기는 나중에. 도망 안 가.]형이 도망 안 간다고 했다.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채이]월요일 오전 열한 시. 봄빛에서 전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반 박자 빨랐다."아버지가 오셨습니다. 1207호에 묵으신답니다. 세 시 체크인.""……1207호요?""네.""지금 그 방 어때요?""스탠다드 객실입니다. 그냥 호텔 방."전화를 끊고 원장님께 반차를 받았다. 원장님은 이유도 안 물었다. 가라. 시아버지 방이면 가야지. 실 라인은 이미 돌았다.호텔 직원 출입구. 반장님이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실 라인은 빠르다."채이 씨. 1207호 맞지.""네. 반장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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