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부담, 돈은 환영이에요

“사모님, 큰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가정부 김명숙이 숨 가쁘게 뛰어 들어와 외쳤다.

주다현은 소스라치게 놀라 벌떡 일어섰고 그녀의 손톱을 칠해주던 네일 아티스트도 손을 멈췄다.

“뭐... 뭐라고요?”

“큰 도련님이 안 죽고 살아 돌아오셨대요!”

김명숙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다시 말했다.

주다현은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지만 다행히 곁에 있던 가정부가 재빨리 그녀를 붙잡아 주었다.

‘이제 끝장이구나!’

배준기가 돌아왔다. 만약 그녀가 멋대로 아이를 낳고 그의 애인인 척하며 그의 집에 들어와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는 그녀를 죽이려 들 것이다.

과거에 그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배준기의 침대에 올라 하룻밤을 보내고 아이를 임신했다.

임신 4개월째 되던 날, 그녀는 당당하게 배준기를 찾아가 임신을 무기로 그와 결혼하려 했지만 배준기는 아이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녀를 비웃으며 10억짜리 수표를 그녀의 얼굴에 집어 던졌다.

그리고 아이를 지우라고 하며 그의 말을 어기고 몰래 아이를 낳는다면 끔찍한 고통을 안겨주겠다고 경고했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그의 잔혹한 눈빛을 주다현은 평생 잊을 수 없었다.

배준기는 한라 그룹의 후계자로 냉혹하고 냉철하며 복수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그의 비서로 일하던 시절부터 주다현은 그의 인간미 없는 잔인한 면모를 숱하게 목격해왔다.

그런데 그녀는 지금 제멋대로 아이를 낳았을 뿐만 아니라 배준기의 숨겨진 애인인 척하며 배씨 가문 별장에 들어와 살고 있으니...

주다현은 공포에 질려 이마에 송골송골 식은땀이 맺혔고 얼굴은 하얗게 질렸다.

‘헬기 추락 사고로 죽었어야 할 남자가 어떻게 살아서 돌아온 거야?’

“사모님,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요. 혹시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세요?”

김명숙이 옆에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주다현은 정신을 차리고는 금세 격앙되고 기쁜 표정으로 바꾸며 말했다.

“아니에요, 너무 기뻐서 갑자기 아무 생각도 안 나네요. 아줌마, 정말 준기 씨가 돌아온 거 확실하죠?”

그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괜히 헛물만 켤까 봐 걱정돼서요.”

“확실해요. 본가에서 온 소식인데 큰 도련님께서 구조되셨대요.”

주다현의 눈빛이 순간 흔들렸다.

“구조되었는데 왜 이제야 돌아오는 거죠? 혹시 크게 다친 건가요?”

김명숙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듣자 하니 큰 도련님께서 머리를 부딪치셔서 기억을 잃으셨다고 합니다. 어르신들 얼굴도 잊으셨다니... 사모님도 못 알아보실 수 있어요.”

말을 끝낸 그녀는 혹시나 사모님이 충격을 받아 다시 쓰러지실까 봐 걱정하며 표정을 살폈다.

예전에 큰 도련님 장례식에서 사모님께서는 임신 중에도 넋이 나간 듯 슬피 우시며 거의 실신할 뻔하셨었다.

그때부터 배씨 가문 사람들은 사모님께서 얼마나 도련님을 끔찍이 사랑하는지 알게 되었다.

하지만 주다현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두 눈을 반짝이며 억누를 수 없는 기쁨을 드러냈다.

“기억을 잃었다고요?”

김명숙은 잠시 당황했다.

“사모님, 왠지 기뻐하시는 것 같네요.”

주다현은 불안했던 마음을 크게 덜어내며 답했다.

“기쁘죠. 준기 씨가 살아서 돌아왔다는데. 살아만 있다면, 저를 잊어도 괜찮아요.”

그녀는 옷매무새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며 지금 이 순간에도 아름다움을 잃지 않도록 신경 썼다.

“차 대기시켜요. 지금 당장 본가로 가야겠어요.”

...

배씨 가문 본가.

“준기 씨, 드디어 돌아오셨군요!”

부드러운 울음 섞인 목소리가 거실의 감동적인 분위기를 순식간에 깨뜨렸다.

주다현은 거실 입구에 서서 배준기와 똑 닮은 남자를 애틋하게 바라봤다.

눈앞의 남자는 짧은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깊고 그윽한 눈매와 오뚝한 콧날을 가진, 강인함 속에 부드러움을 간직한 모습이었다.

‘부드러움이라니? 이 사람이 3:7 가르마에 날카로운 눈빛으로 카리스마를 뽐내던 한라 그룹의 냉철한 배 대표가 맞나?’

주다현은 몇 초간의 짧은 관찰을 통해 배준기가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이 사실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너무 잘됐다! 하늘도 나를 돕는구나!’

배준기는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그러자 눈부시게 아름다운 얼굴에 뽀얀 피부를 가진 여인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촉촉하게 젖은 눈망울로 찰랑거리는 긴 웨이브 머리를 어깨너머로 늘어뜨린 채 가녀린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배준기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물었다.

“당신이 내... 여자친구?”

조금 전에 부모님이라고 소개받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다.

그의 여자친구는 비행기 사고 소식에도 굴하지 않고 굳건히 그의 유복자를 낳았다고 말이다.

주다현은 손톱으로 손바닥 안쪽을 깊숙이 찔렀다. 고통이 눈물을 불러왔지만 눈동자에 맺힌 눈물은 떨어질 듯 말 듯 매달려 있었다.

“네. 당신의 다현이에요.”

그녀의 목소리는 메어 있었고 흐느끼는 듯한 억양이 가슴 아프게 울렸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쏜살같이 달려가 그의 품에 안겼다.

“준기 씨...”

남자는 온몸이 경직되며 본능적으로 여자를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주다현이 순순히 물러설 리 없었다. 그녀는 노련한 솜씨로 그의 품에 바싹 달라붙어 그가 꼼짝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는 애처롭게 그의 손가락을 감싸 쥐며 간절하게 속삭였다.

“모두가 당신이 죽었다고 했지만 저는 믿지 않았어요. 당신은 그토록 나를 사랑했는데 우리 아기를 보기도 전에 우리를 버리고 떠날 리가 없잖아요? 꼭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었어요.”

그녀는 눈물을 글썽이며 가냘픈 어깨를 가늘게 떨었다.

옆에 앉아 있던 서경희는 고개를 숙여 눈물을 훔쳤고 배지원 역시 눈시울이 붉어진 채 한숨을 내쉬었다.

배준기는 점점 몸에서 힘을 풀고 더 이상 그녀를 밀어내지 않았다. 대신 어설프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미안해요. 머리를 다쳐서 많은 걸 잊어버려서 당신을 알아보지 못했어요.”

그의 말에 주다현은 눈을 크게 뜨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준기 씨, 절 기억 못 하시는 거예요?”

그녀는 멍하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눈에는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고 콧등이 적당히 붉어지자 그제야 눈물이 뚝 떨어졌다.

그녀는 이 연기를 거울을 보며 수없이 연습했었다.

이렇게 해야 남자의 보호 본능과 죄책감을 더욱 자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배준기는 시선을 내리깔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미안해요. 정말로 기억을 잃었어요.”

주다현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굳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당신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해요. 비록 저와 아기를 잊었지만 언젠가는 기억해낼 거라고 믿어요.”

쳇, 그녀는 배준기가 영원히 기억을 되찾지 못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네.”

배준기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아무런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건조하게 답했다.

말을 마친 그는 자연스럽게 품에 안고 있던 여자를 살짝 밀어냈다.

주다현은 만족스러운 듯 빠르게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 소파에 앉아 있는 낯선 여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분은 누구시죠?”

서경희는 즉시 소개했다.

“다현아, 이분은 준기의 생명의 은인이야. 김지안이라고 해.”

김지안, 이름처럼 차분해 보였다. 갸름한 얼굴에 단아한 이목구비를 가졌지만 피부가 조금 검은 편이었다. 아마 햇볕에 그을린 듯했다.

그녀는 평범한 원피스 차림으로 값비싼 가죽 소파에 앉아 어색하고 불편한 듯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김지안이라고 합니다.”

주다현이 입을 열기도 전에 배준기가 김지안 앞에 나섰다.

“그때 제가 운 좋게 살아남아서 바다에 떠다니고 있을 때, 지안이와 덕길 삼촌이 절 구해줬어요.”

주다현은 남자가 보호하려는 듯한 행동을 보이자 속으로 코웃음 쳤다.

‘재벌가 안주인이 되는 길이 생각보다 순탄치만은 않을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