เข้าสู่ระบบ제4조. 서로에게 진짜로 빠지면 즉시 계약 파기.
(발동 조건: 충족. 발동권자: 갑.)
1월의 편의점 파라솔은 추웠다. 파라솔 아래 테이블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았다. 당연했다. 영하 오 도였다.
서윤은 일곱 시 오 분 전에 도착했다. 편의점에 들어가 냉장고 앞에 섰다. 복숭아 맛 맥주 하나. 그리고 온장고에서 캔 커피 하나. 뜨거운 블랙. 이 사람은 여름에도 뜨거운 걸 마시니까.
계산대에서 직원이 물었다. "밖에서 드시게요? 추운데."
"네. 회의가 있어서요."
직원은 이상한 얼굴을 했지만 봉투를 건넸다.
파라솔 아래 의자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서윤은 목도리를 한 번 더 감고 앉았다.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 선배 오늘 칼퇴하셨네요]
[민지: 친구분 오늘 뭐 하시는 날이에요?]
[정서윤: 회의.]
[민지: 파이팅. 친구분도, 선배도.]
서윤은 휴대폰을 뒤집어 테이블에 놓았다. 입속으로 첫 문장을 한 번 굴려 봤다. 기획 발표 전에 늘 하던 일이었다. 5년 동안 수백 번 발표했는데, 이번 발표는 청중이 한 명이었다. 그리고 반박당하면 끝이었다.
일곱 시 정각에 이현이 왔다. 코트 깃을 세우고, 손에는 남색 텀블러를 들고. 뚜껑의 '뜨거운 거, 식혀서'가 편의점 불빛에 반짝였다.
"커피 사 놨는데." 서윤이 캔을 밀었다.
"텀블러도 있어요. 둘 다 마실게요."
그는 맞은편에 앉았다. 첫날 밤과 같은 자리였다. 파라솔 위로 가로등 불빛이 번졌다. 계절만 달랐다.
탁. 서윤이 캔을 땄다. 복숭아 향이 차가운 공기 속에 퍼졌다. 한 모금 마셨다. 볼이 금방 뜨거워졌다. 추위 탓인지 술 탓인지, 오늘은 굳이 구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지갑에서 냅킨을 꺼내 테이블 위에 펼쳤다. 넉 달 동안 접혔다 펴지며 천처럼 보드라워진 냅킨. 노란 포스트잇. 밑줄 두 번. 뒷면에 비치는 제5조.
"안건은 하나예요."
"네."
"제4조 발동합니다. 계약 파기해요."
이현은 움직이지 않았다. 텀블러를 쥔 손도, 얼굴도. 회의실에서 반박을 들을 때처럼 고요했다. 다만 눈이 한 번, 아주 천천히 감겼다가 떠졌다.
"……알아요." 그가 말했다. "제가 위반했으니까. 서윤 씨가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요즘……."
"아뇨."
서윤이 그의 말을 잘랐다. 5년 동안 회의에서 그랬듯이. 한 치도 물러서지 않고.
"제가 위반했어요."
이현이 서윤을 봤다. 반박할 말을 고르는 얼굴이 아니었다. 처음 보는 코드를 읽는 얼굴이었다. 한 줄씩,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서윤 씨가요?"
"네. 갑이요."
"이유를 말할게요. 파기에는 사유가 있어야 하니까요. 기획서처럼."
서윤은 휴대폰을 꺼냈다. 메모장. 파일 이름은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11월에 만들었고, 그 뒤로 한 번도 지우지 않았다. 항목은 열두 개로 늘어 있었다.
그녀는 읽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발표하듯이.
"하나. 차이현 씨 말투를 따라 해요. '방금 생겼어요.' 민지가 토씨 하나 안 틀린대요."
"둘. 차이현 씨 없는 회의를 상상하면 편할 것 같은데, 편한 게 싫어요."
"셋. 메신저 알림이 오면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해요. 매번."
"넷. 워크숍 날 젖은 왼쪽 어깨가 석 달째 생각나요."
"다섯. 두부 사진을 오 분 넘게 봤어요. 그 다음 주에 사진이 안 왔을 때는, 새벽까지 기다렸어요."
이현의 손이 텀블러 위에서 멈췄다.
"여섯. 디자인팀 신입한테 포스트잇 줄 때, 빨대를 끝까지 씹었어요."
"일곱. 회색 까치를 끝까지 봤어요. 차이현 씨가 기분 안 좋은 사람들 생각해서 넣었다길래."
서윤은 거기서 멈췄다. 남은 항목이 다섯 개 있었다. 더 읽을 필요가 없었다. 그녀는 휴대폰을 엎었다.
"그리고 마지막 거는, 기준표에 없어요. 너무 짧아서요."
"……뭔데요."
서윤은 이현을 똑바로 봤다. 연수 강당에서 원고를 덮던 날처럼.
"가지 마요."
바람이 파라솔 천을 한 번 흔들었다.
"이 말을 하면 제4조에 걸리니까요. 그래서 먼저 파기하고 말하는 거예요. 순서대로." 서윤은 캔을 쥐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부칙대로 회의에서 한 번 질게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 말 들어요."
이현은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텀블러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손을 뻗어 냅킨을 자기 쪽으로 천천히 끌어당겼다. 제4조 줄 끝, 접힌 자국 위의 괄호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거, 봤어요?"
"봤어요. 크리스마스 다음 날."
"그래서 다음 날 커피를 직접 사셨어요?"
"……해석 A로 읽어서요."
"해석 A가 뭔데요."
"을은 빠질 일이 없으니까, 제외."
이현이 소리 없이 웃었다. 추석 밤 작은방에서 휴대폰을 보며 웃던 것과 같은 웃음이었다. 서윤은 그 웃음을 본 적이 없었지만.
"B예요."
"……B요?"
"을이 빠져도, 계약은 안 깨진다." 이현이 괄호를 손가락으로 톡 쳤다. "그날 서명하면서 썼어요. 서윤 씨가 제 서명 보고 있을 때. 손목만 옮겨서."
"왜요."
"제가 빠져도 이 계약이 깨지면 안 되니까요. 5년 만에 처음 생긴 자리였어요. 맞은편 말고, 옆자리. 조항 하나 때문에 그걸 잃고 싶지 않았어요."
"그럴 일은 없을 것 같다면서요. 제4조 쓸 때. 웃으면서."
"그럴 일은 없었죠." 이현이 말했다. "새로 빠질 일은요. 이미 빠져 있었으니까."
서윤은 캔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려서 캔이 테이블에 부딪혀 작은 소리가 났다.
"……2021년 3월 2일."
"보셨어요?"
"송년회 때요. 글씨 줄이다가."
"아." 이현이 코트 깃에 턱을 묻었다. "비밀번호도요?"
"0302."
"그건 좀 봐 주세요."
"생일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차이현 씨 생일 몰라서."
"제 생일은 11월이에요."
"……11월 언제요?"
"워크숍 첫날이요. 어깨 말리던 날."
서윤은 입을 벌렸다. 그날 그녀는 '까치 일정 밀려요'라고 보냈다. 생일인 사람한테.
"괜찮아요. 이제 아시면 되죠."
서윤은 웃음이 터졌다. 터지면서 눈가가 뜨거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복숭아 맥주를 마셨다. 캔으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첫날 밤에도 이랬던 것 같았다.
"그럼 비상계단 통화는요." 캔 너머로 서윤이 물었다. "설 지나고 정리할 게 하나 있다는 거."
이현의 눈이 조금 커졌다. "들었어요?"
"반칙인 거 알아요. 남의 통화."
"남의 폰은 서윤 씨가 먼저 봤잖아요. 아니, 제가 먼저 봤나."
"그 정리할 거 하나가 뭐였는데요."
이현이 파라솔 기둥에 등을 기댔다. 그리고 대답했다. 스펙을 읽듯 담담하게. 다만 그 목소리 밑에 무언가가 깔려 있었다. 5년 치의 무언가.
"이거요. 설 끝나고, 계약 끝나면 말하려고 했어요. 계약 기간 중엔 말하면 안 되니까. 추석 마지막 날 그 1분에 하려던 말도, 이거였어요."
"……그리고요?"
"차이면, 부산 가려고요. 매일 맞은편에 앉을 자신이 없어서." 그가 텀블러를 내려다봤다. "매직도 그래서 샀어요. 제가 없어도 쓰시라고. 차일 준비를 한 거예요. 공수를 미리 잡아 둔 거."
"……바보예요?"
"개발자예요."
"그게 그거잖아요."
"할머니도 그렇게 말씀하세요."
서윤은 캔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이현의 손 위에 얹었다. 차가운 손이었다. 텀블러를 쥐고 있었는데도.
"지금 제3조 걸려요?" 이현이 물었다.
"계약 파기됐잖아요. 조항 없어요."
"그럼 이건 필요해서 잡은 거 아니네요."
"아니에요."
"그럼 뭐예요?"
"그냥요."
이현이 손을 뒤집었다. 손바닥이 위로. 그리고 서윤의 손가락 사이로 천천히 손가락을 끼웠다. 첫 마디에서 멈추지 않고, 끝까지. 식탁 밑도 아니고, 로비도 아니고, 누구의 눈도 없는 1월의 파라솔 아래였다.
"그 1분에 하려던 말, 지금 해도 돼요?" 그가 물었다.
"……해요."
"좋아해요."
그는 그 말을 오래 들고 있던 사람처럼 말했다. 서두르지도, 떨지도 않고.
"5년 전 3월부터."
서윤은 대답 대신 잡은 손에 힘을 줬다. 식탁 밑에서 그가 했던 것처럼, 아주 조금.
테이블 위에서 서윤의 휴대폰이 짧게 울었다. 뒤집어 놓은 화면 가장자리로 불빛이 샜다. 서윤은 잡지 않은 손으로 화면을 확인했다.
[할머니: 둘이 뭐 하나]
"……할머니요."
"저한테도 왔어요." 이현의 코트 주머니에서도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같은 시각에. 요즘 두 사람한테 동시에 보내는 법을 배우셨대요."
[할머니: 사진]
서윤은 휴대폰을 들어 올렸다. 화면 안에 둘이 들어갔다. 파라솔, 가로등, 복숭아 맥주 캔, 남색 텀블러. 그리고 테이블 위에 깍지 낀 손.
찰칵.
사진 속 두 사람은 증명사진 같지 않았다. 둘 다 코끝이 빨갰고, 둘 다 웃고 있었다. 이번엔 누가 먼저 웃었는지 알 것 같았다.
답은 일 분도 안 돼서 왔다.
[할머니: 인자 됏다]
받침은 또 틀렸다. 뜻은 틀리지 않았다.
한참 뒤, 이현이 잡지 않은 손으로 휴대폰을 꺼냈다. 메일 앱. 임시 보관함. '제안 수락의 건'.
그는 서윤이 보는 앞에서 그 메일을 삭제했다. 휴지통까지 비웠다. 반듯하게.
"거절 메일은 내일 쓸게요. 오늘은 한 손밖에 없어서."
서윤은 웃었다. 그리고 테이블 위의 냅킨을 봤다. 파기된 계약서. 제1조부터 부칙까지, 이제 아무것도 효력이 없었다.
"그럼." 서윤이 말했다. "이제 우리 계약이 없는 거네요."
"네."
"……그럼 우리 지금 뭐예요?"
이현이 냅킨을 반으로 곱게 접어 서윤에게 내밀었다. 첫날 밤처럼.
"새 계약서 써 올게요. 이번엔 냅킨 말고."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편의점 냅킨. 아이보리색. '않는다'에서 볼펜이 한 번 번졌다. 1년 전과 같은 볼펜이었다.)"제가 먼저 할게요." 서윤이 말했다."제가 먼저 왔는데요." 이현이 말했다."반차 쓰고 먼저 온 건 반칙이에요.""예약은 양쪽이었다면서요. 직원분이.""그걸 어떻게 알아요?""서윤 씨는 제가 예약한 거 어떻게 알았는데요?"둘은 캔 네 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봤다. 이 파라솔은 회의가 끝나는 곳이었지 시작되는 곳이 아니었다."둘째 이모요." 서윤이 먼저 털어놓았다. "양쪽 다, 라고 했어요. 그리고 편의점 직원분이 양쪽 예약이라고 했고, 팀장님이 양쪽에서 같은 걸 부탁한다고 했어요. 세 군데서 양쪽이 나오면 결론은 하나예요.""……저는 쓰레기통이요.""네?""쓰레기통 뚜껑이 제가 닫은 방향이랑 반대로 닫혀 있었어요. 8월 마지막 토요일에요. 그날 서윤 씨 그릇을 세 번 헹궜어요."서윤은 입을 벌렸다. 이 사람은 쓰레기통 뚜껑 방향까지 봤다."그럼 부칙으로 해요." 이현이 말했다."무슨 부칙이요.""원래 부칙이요. 위반한 쪽은 한 번 져 준다. 우리 둘 다 야근이라고 거짓말했잖아요. 둘 다 위반이에요. 근데 제 거짓말이 더 말이 안 됐어요. 반차 쓰고 야근이라니.""……그건 인정해요.""그러니까 제가 질게요." 이현이 손바닥을 서윤 쪽으로 펼쳤다. "먼저 하세요."서윤은 그를 봤다. 1년 전 이 자리에서 이 사람은 부칙을 제안했다. 위반한 쪽은 회의에서 한 번 져 준다. 그때는 그게 싸움의 규칙인 줄 알았다. 이제는 알았다. 그건 이 사람이 지는 법을 만들어 둔 거였다. 그녀한테만.서윤은 지갑을 꺼냈다. 카드칸에서 A4를 꺼냈다. 네 번 접힌 종이를 테이블 위에 펼쳤다. 냅킨 옆에. 아직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이현의 아이보리색 냅킨 옆에."청혼 기획서 v1.0입니다."이현이 숨을 멈췄다. 이 사람이 숨을 멈추는 건 처음 봤다.서윤은 발표를 시작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게. 원고를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추석 연휴 마지막 날 자정까지로 한다.(1년 전 이맘때, 추석을 며칠 앞둔 밤에 편의점 냅킨에 쓴 조항. 지금은 파기됐고, 지갑 카드칸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자정까지'의 번진 자국도 그대로.)"그러니까 차이현 씨 말은, 이 기능을 넣자는 거죠."회의실 화면에는 서윤이 2주 밤을 새운 기획서가 떠 있었다. 슬라이드 제목은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최종 점검 회의였다. 오픈은 내일 0시."넣자는 게 아니라." 테이블 맞은편에서 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이미 넣었다는 겁니다."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멈췄다."……뭘요?""보름달 차오르는 연출이요. 유저가 편지를 쓰면 달이 한 칸씩 차오르는 거."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1년 전 이 회의실에서 서윤은 그 연출이 이벤트의 핵심이라고 했다. 이현은 연휴 전에 못 넣는다고 했다. 못 넣는 거랑 안 넣는 거랑은 다르죠. 결과는 같죠. 팀장이 간소화 버전으로 정리했다. 달은 끝내 차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날 밤 편의점에서 냅킨 계약서가 생겼다."시즌2 기획서엔 그 연출 없었잖아요. 제가 뺐어요. 작년에 안 된다고 하셔서.""그래서 제가 넣었어요. 따로.""언제요?""작년 추석 끝나고부터요. 틈틈이.""1년 동안요?""공수가 많이 들었어요. 1년 걸렸어요." 이현이 화면을 넘겼다. 테스트 영상이었다. 유저가 편지를 한 통 쓸 때마다 까만 하늘의 달이 가장자리부터 차올랐다. 은은하게, 천천히. 마지막 편지가 들어가자 보름달이 꽉 찼다. 달 속에서 토끼가 고개를 들었다.회의실이 조용했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 잔을 든 채 굳었다. 옆에서 민지가 조용히 그의 컵을 받아 테이블에 내려놓아 줬다.서윤은 화면을 봤다. 1년 전 그녀가 사흘 밤을 새워 그린 연출이었다. 그대로였다. 아니, 더 좋았다. 그녀가 그렸던 것보다 달이 천천히 찼다. 기다리는 시간이 길었다."……이거, 제 원래 기획서 그대로예요.""네. 원본 남겨 뒀어
청혼 기획서 v1.0. 작성: 정서윤. 검토: 없음. 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 정하지 않는다.(작성 기간 2주. 수정 횟수 열일곱 번. 제1조는 한 번도 고치지 않았다. 고친 건 전부 마지막 한 문장이었다.)"선배, '결혼해요'예요, '결혼할래요'예요?"민지가 물었다. 국숫집이 아니라 회사 소회의실이었다. 점심시간. 문에는 '회의 중'이 걸려 있었다. 화면에는 슬라이드가 떠 있었다. 청혼 기획서 v1.0. 열일곱 번째 수정본."그게 지금 제일 큰 이슈야.""청유형이냐 의문형이냐.""청유형은 확신이 있어 보이는데, 상대한테 선택권이 없어 보여. 의문형은 선택권을 주는데, 자신 없어 보이고.""차 선임님이라면 뭐라고 반박하실까요?"서윤은 레이저 포인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이현의 목소리를 흉내 냈다. 1년 동안 들어서 토씨까지 외운 목소리."'청유형은 유저가 부담스러워해요. 의문형은 유저가 거절할 수 있어요. 거절 확률이 있는 문장은 공수 낭비예요.'"민지가 박수를 쳤다. "똑같아요. 소름.""그럼 그 사람은 뭐라고 할 것 같아?""그냥 '네' 하실 것 같은데요. 어느 쪽이든."서윤은 슬라이드를 봤다. 마지막 장. 문장이 두 개 나란히 있었다. 결혼해요. 결혼할래요. 둘 다 빨간 줄이 한 번씩 그어졌다가 지워진 흔적이 있었다."……그러니까 더 어려운 거야. 뭘 해도 '네' 할 사람한테 뭘 물어야 할지."민지의 휴대폰이 울렸다. 민지는 화면을 보더니 귀가 빨개졌다. 윤재하였다. 둘이 사귄 지 3주째였다. 컵에 쓰는 글씨는 매일 한 줄씩 길어지고 있다고 했다."선배, 제 친구가요, 아니 제가요." 민지가 휴대폰을 엎었다. "재하 씨한테 청유형이랑 의문형 중에 뭐가 좋냐고 물어봤거든요. 어떤 선배 얘기라고 하고.""……민지야.""이름은 안 말했어요! 근데 재하 씨가 그러더라고요. 개발자는 의문형을 좋아한대요. 반환값이 있으니까.""반환값.""네. '네'라는 반환값이요."서윤은 이마를 짚었다. 그리고 웃었다. 이 회사 개발자들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회칙 제1조. 정서윤에게는 비밀로 한다.(방장: 큰이모. 회원 여덟 명. 개설일: 여름휴가 마지막 날 밤, 평상에서 아빠가 보고한 직후.)이현의 휴대폰에는 단톡방이 하나 더 있었다.방 이름은 '추석 거사 준비위원회'. 알림은 무음으로 해 두었다. 무음으로 해도 하루 이백 개가 쌓였다. 서윤 앞에서 휴대폰을 뒤집는 횟수가 여름 이후로 세 배가 됐다. 그 사람은 눈치가 빨랐다. 아마 이미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 속 냅킨까지 봤을 리는 없지만.회원은 여덟 명이었다. 큰이모, 둘째 이모, 막내 이모, 서윤 어머니, 서윤 아버지, 할머니, 이현 어머니. 그리고 이현.방장은 큰이모였다. 첫 공지는 이랬다.[큰이모: 회칙 제1조. 서윤이한테는 비밀. 어기면 고추장][큰이모: 회칙 제2조. 방장 퀴즈 통과 못 하면 거사 불허][막내 이모: 제3조 추가 요청. 주선자석 확보][큰이모: 기각]9월 첫째 주 수요일 밤, 이현은 퇴근하고 집에 와서 식탁에 앉았다. 식탁 위에는 회사 앞 편의점 냅킨이 한 묶음 쌓여 있었다. 아이보리색. 스무 장쯤 남았다. 처음엔 오십 장이었다.그는 볼펜을 쥐었다. 셔츠 주머니에 늘 꽂혀 있던 볼펜. 6년 전 입사 연수 때 받은 사은품 볼펜이었다. 1년 전 이맘때 그 밤, '자정까지'를 쓰다 한 번 번진 그 볼펜.냅킨 한 장을 펼쳤다. 썼다.'제1조. 본 계약의 기간은'거기서 멈췄다.또였다. 서른 번째였다. 그는 기간을 쓸 수 없었다. 공수를 따지는 머리가 자꾸 숫자를 요구했다. 기간은 날짜로 끝나야 했다. 끝이 없는 기간은 사양서에 쓸 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끝이 있으면 안 됐다. 막내 이모의 제5조. 이번엔 기간 없이.'평생'이라고 써 봤다. 너무 컸다. 과장 같았다. 서윤은 과장을 싫어했다. 기획서에 '최고의'라는 말이 들어가면 빨간 줄을 그었다.'무기한'이라고 써 봤다. 너무 딱딱했다. 계약 해지 조항 같았다.'영원히'는 쓰다가 스스로 구겼다.냅킨이 또 하
추석 이벤트 시즌2 기획서 제2항. 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제한한다.(1년 전 이 조항 때문에 회의실이 두 번 뒤집혔다. 올해는 발의자와 반대자가 바뀌었다.)8월 마지막 주 월요일, 12층 대회의실.화면에는 슬라이드 첫 장이 떠 있었다. '추석 이벤트: 달토끼의 소원 편지 시즌2'. 작년 슬라이드와 똑같은 폰트, 똑같은 달토끼. 달만 조금 더 컸다."편지 글자 수는 40자로 가겠습니다." 서윤이 말했다.회의실의 여섯 명이 동시에 커피를 들었다. 작년에 이 조항으로 두 시간을 싸웠다. 그때 40자를 밀어붙인 건 이현이었다. 서버에 저장하니까요, 라고. 서윤은 문자도 그보다 길다고 버텼다. 결국 40자로 갔다. 이현이 이겼다. 그리고 유저 게시판 추천 1위는 '40자로는 할머니한테 안부도 다 못 쓴다'였다.그런데 올해는 서윤이 먼저 40자를 꺼냈다.이현이 노트북을 반쯤 덮었다. "왜 40자예요?""짧아야 계속 생각나니까요.""작년엔 40자는 짧다고 하셨잖아요.""작년엔 몰랐어요. 짧은 게 좋은 거.""저는 80자를 제안합니다."회의실이 술렁였다. 개발팀 막내 윤재하가 커피를 마시다 사레가 들렸다. 민지가 그의 등을 두드렸다. 두드리는 손이 조금 오래 머물렀다."……차이현 씨가 80자요? 공수 늘어나는데요?""등대 편지에서 80자 해 봤잖아요. 유저 반응이 제일 좋았던 게 긴 편지였어요. 기다리는 80초가 설렘이라면서요. 정 선임이 부산에서 그렇게 말했어요.""그건 등대고요. 달토끼는 보름달이 차오르는 연출이라 짧아야 돼요.""긴 편지가 차오르면 더 보기 좋죠.""길면 읽는 사람이 무서워해요.""누가 그래요?""제가 그래요."팀장이 두 손을 들었다. 작년과 똑같은 자세였다. 다만 표정이 달랐다. 작년에는 지친 얼굴이었고, 올해는 즐거운 얼굴이었다."자, 자. 60자로 가자. 중간. 됐지?""네.""네."동시였다. 둘은 서로를 노려봤다. 그리고 동시에 웃었다. 작년 이 회의가 끝나고 탕비실에서 엄마 문자가 왔다. 그리고
제4조 해당 여부 판단 기준표(참고용). 부록. 본 기준표는 필요한 사람에게 물려줄 수 있다.(작성자 정서윤. 작년 11월 작성, 12항목. 올해 8월, 처음으로 양도.)8월의 국숫집은 에어컨이 약했다.민지는 냉국수를 시켜 놓고 한 젓가락도 먹지 않았다. 젓가락으로 오이채만 옮기고 있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서윤은 그 동작을 알았다. 작년 가을, 이 자리에서 그녀가 빨대를 씹던 동작과 같은 종류였다."선배.""응.""제 친구 얘기인데요."서윤은 국수를 삼키다 멈췄다.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국물 한 숟가락으로 막았다. 1년 전 그녀가 한 말이었다. 토씨 하나 안 틀리고."……응. 친구.""제 친구가요, 회사에 어떤 사람이 있는데요. 그 사람이 회의 때 제 친구가 말할 때만 노트북을 덮는대요."서윤은 이번엔 국물로도 못 막았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왜 웃으세요.""아니야. 계속해.""다른 사람 말할 땐 계속 타자 치거든요. 근데 제 친구가 말하면 딱 덮어요. 반쯤." 민지가 오이채를 또 옮겼다. "그리고 제 친구가 뭘 제안하면 맨날 '안 됩니다'부터 해요. 이유는 그다음에 말하고요.""그래서 친구는 그 사람이 싫대?""아뇨." 민지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문제래요. 안 싫대요. '안 됩니다'를 듣는 게 좀 좋대요. 그 사람이 자기한테만 제대로 반박하는 것 같아서."서윤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이제 웃을 수가 없었다. 너무 잘 아는 얘기였다."민지야. 그 사람, 키 크고 개발팀이지."민지의 귀가 빨개졌다. "……친구 얘기라니까요.""그 사람 파란등대랑 회의할 때 '안 됩니다' 제일 먼저 가르쳐 준 사람이 나야. 부산 가기 전에 그 사람이 나한테 물어봤거든. 기획자한테 반박 어떻게 하냐고. 그 사람 이름 두 글자지. 윤재하."민지가 냉국수에 얼굴을 묻을 뻔했다."선배 어떻게 알아요!""너한테 배웠어. 촉은 옮는 거래."민지는 한참 오이채를 노려보다가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 화면을 서윤 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