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아버지의 방치와 계모의 학대 속에서 벼랑 끝에 내몰린 지시연은, 결국 G시 최고 권력자인 고유건과의 결혼을 강요받는다. 그러나 결혼식 당일, 남편 유건은 시연이 혼전순결을 잃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그녀의 사생활과 도덕성을 신랄하게 비난하며 갈등의 불씨를 지핀다. 결국, 시연은 열 달 동안 품었던 아이를 세상에 내놓은 후, 아무도 모르게 사라지기로 결심한다. 몇 년 후, 지시연이 다시 G시로 돌아왔을 때, 그녀의 곁에는 한 어린아이가 함께였다. “고 대표님, 전담의가 필요하시다면서요?” 유건은 시연이 놓은 덫에 스스로 걸려들었다. “오늘부터 당신을 내 전담의로 채용할게.” 그 후, 세상 사람들은 부인도 애인도 필요 없다는 유건이 전담의에게만은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쏟고, 심지어 그녀의 아들이 누구의 아들인지도 모른 채, 마치 자기 자식처럼 아낀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는데...
더 보기진아는 입술을 꾹 눌렀다가, 고개를 들어 지하를 바라봤다.“왜 그렇게 물어?”“그냥... 느낌이 그래.”지하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우리 자기 별로 안 행복해 보여.”그는 고개를 기울여 진아의 뺨에 자기 뺨을 붙였다.“나 때문이야?”‘아직도 어제 설아 전화 때문에 그런 건가?’“아니야.”진아는 얼굴을 스치고 지나가는 지하의 체온이 조금 불편해 몸을 돌렸다.지하 품 안에서 반쯤 돌아서 그의 가슴에 기대며 말했다.“그냥... 결혼하면 아빠, 엄마랑 떨어져 지내야 하잖아. 그게 자꾸 생각나서.”“그게 이유야?”지하는 눈썹을 치켜세웠다.“응.”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못 믿겠지? 그렇지, 남자들은 이해 못 할 거야.”“믿어.”지하는 얼른 그녀를 꼭 끌어안고 부드럽게 달랬다.“못 믿는 게 아니라... 난 그게 그렇게까지 슬플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서.”“응?”“바보야.”지하는 진아의 코끝을 자기 코끝으로 장난스럽게 비비며 웃었다.“결혼한다고 해서 부모님이랑 떨어져 지내는 거 아니야. 장인어른, 장모님 생각나면 언제든지 가면 되지. 며칠이고 같이 지내도 상관없어.”“정말?”진아는 살짝 웃으며 물었다.“거짓말 아니지?”“거짓말 아니야.”“그럼 됐어!”진아는 볼을 불쑥 부풀렸다.“나 지금 당장 집에 가고 싶은데, 괜찮아?”“당연히 괜찮지.”지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으며 미소 지었다.“지금 바로 가자. 근데,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나도 같이 데려가 줘.”그 말과 함께, 지하는 진아의 손을 잡고 연구동을 함께 나섰다....차에 올라 부모님 집으로 향하는 길, 진아는 여전히 어딘가 꿈같은 기분이었다.“진짜 우리 집에 가는 거야?”“그럼.”지하는 단호했다.“어서 장인어른, 장모님께 전화드려. 우리가 뭘 먹든 상관없지만, 장인어른 장모님은 준비 못 하셨다고 괜히 자책하실 거야.”“아, 알았어.”진아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핸드폰을 꺼냈다. 그러면서도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전화를 걸어, 수화기가 연결
상자 안에는 루비 주얼리 세트가 들어 있었다.루비는 진아의 행운석이자, 가장 좋아하는 보석이었다.한눈에 봐도 값비싼 이 세트가 진아의 가슴 위에 묵직하게 내려앉았다.그뿐만 아니라, 상자 안에는 작은 쪽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진아는 종이를 집어 들며 이미 짐작했다.‘펼치기도 전에 알겠네, 누구일지.’종이를 열어보니, 예상대로였다.익숙한 글씨체. 성빈이었다.[진아, 곧 인생의 새로운 단계를 맞이하겠구나. 내가 직접 가지 못해 아쉽다. 좋은 사람 만나, 늘 웃음이 끊이지 않기를. 진아, 행복해라.]짧은 몇 줄에 불과했지만, 진아의 눈가가 금세 젖었다.성빈과 진아 사이엔 불편한 기억도 있었지만, 부정할 수 없는 건 십여 년의 우정이었다.성빈의 축복을 받으니, 진아는 마음이 따뜻해졌다.물론, 눈가가 시큰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어쩌면, 어떤 사람들은 연인이 아니라 친구로 남아야 더 오래가는 걸지도 몰라.’시간이 많이 흘렀고, 진아는 이제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루비 세트를 다시 고이 넣어 드레스룸 안에 두고, 진아는 눈이 불편해져 아래층으로 내려갔다.오후에 외출할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눈을 좀 식혀야 했다.부엌에 들어서니, 하순자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그는 진아를 보자마자 물었다.“임 선생님, 무엇이 필요하세요?”“얼음을 좀 찾으려고요.”진아는 웃으며 대답했다.“제가 직접 할게요, 아줌마는 하시던 거 하세요.”“아, 네.”하순자는 고개를 끄덕였다.진아는 냉동실에서 얼음을 꺼내 얼음주머니에 담아 눈가에 얹었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순자는 마음속으로 생각했다.‘임 선생님... 울었던 것 같은데. 왜일까?’‘어제는 분명 축하받아야 할 날이었는데...’하순자는 원래 이런저런 일에 끼어드는 성격은 아니었다.하지만 집안 주인이 워낙 새 안주인에게 예민하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터라, 자신도 모르게 더욱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점심 무렵, 하순자의 핸드폰이 울렸다.“대표님.”[네.]지하였다.전화의
은범이 조용히 말했다.“나도 그냥 들은 얘긴데, 부 대표 예전에 여자친구가 하나 있었대.”“하나뿐이었다고?”시연은 눈이 동그래졌다.“생각보다 되게 장기간 연애파네?”‘이건 큰일인데... 부지하가 그렇게 한 여자만 파는 성격이면...’‘진아한텐 결코 좋은 징조가 아니잖아.’은범은 어깨를 으쓱였다.“장기간인지는 모르겠고... 근데, 그 여자친구랑 왜 헤어졌는지 궁금하지 않아?”“궁금하지! 그렇게 좋아하는데, 왜 헤어졌대?”시연은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은범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좀 웃긴 얘기야. 그 여자... 부 대표 친구랑 사귀었대.”“뭐...??”시연은 순식간에 눈이 휘둥그레졌다.‘이게 무슨 막장 드라마야?’‘여자친구랑 절친이랑... 배신도 그런 배신이 없네.’시연은 예전에 진아가 해준 이야기가 떠올랐다.오설아가 이미 결혼했다고 했는데, 시연과 진아는 단순히 지하가 짝사랑에 실패한 줄만 알았다.근데 이건... 사랑을 빼앗긴 게 아니라 배신을 당한 거였다.“봐.”은범은 손을 들어, 시연 입가를 가볍게 가리켰다.“얘기 듣느라 정신 팔려서... 우유랑 브라우니 가루가 입술에 묻었어.”“진짜?”시연은 얼굴이 달아올라, 황급히 손으로 입술을 닦았다.“나 혼자 할 수 있어...”그 순간, 멀리 연회장 구석에서 유건이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은범과 시연 사이의 사소한 장면 하나에도, 유건의 시선은 본능처럼 따라갔다.유건은 묵묵히 잔을 들어 올렸다.투명한 보드카를 한 번에 삼켜내며, 매서운 알코올이 목을 태우는 감각을 애써 참았다.‘아무렇지 않은 척해야지... 그래도, 쉽지 않네.’...그날 밤, 지하는 진아를 제대로 ‘모셨다’.끝나고 난 뒤, 진아는 침대에 엎드린 채 꿈쩍도 하기 싫었다.“물 좀 마셔.”지하가 컵을 들고 다가와 안아주려 하자, 진아는 손사래를 쳤다.“아, 아냐. 손대지 마.”“뭐?”지하는 피식 웃었다.“쓰고 버리는 거야? 자기야, 그건 너무하다.”“뭐래?”
약혼식은 엄숙하면서도 북적였다.약혼식임에도 불구하고, 증인으로 진아의 지도교수가 직접 참석했고, 사회는 지하의 셋째 형 부호준이 맡았다.지하의 부모님과 임병지, 채숙희가 한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특히 지하의 어머니 이혜영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숙희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사부인,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딸이 없어요. 앞으로 진아가 제 딸입니다. 저는 아들보다 며느리를 더 챙겨요. 안 믿기시면...”이혜영은 손가락으로 몇 명의 며느리를 가리켰다.“우리 며느리들한테 물어보셔도 돼요.”“정말 그렇습니다.”옆에 있던 지하의 형수들이 곧장 거들며 웃었다.“마음 놓으세요.”이혜영은 다시 다정하게 말을 이어갔다.“이제 제 며느리들도 다 한발 물러설 거예요. 다들 알잖아요, 제가 지하를 제일 아낀다는 거... 어쩔 수 없어요, 막내거든요. 지하 낳을 때 저는 고령 산모였어요. 그래서 지하 아내는 제가 더 애지중지할 겁니다.”채숙희는 눈물을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사부인께서 이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옆에서 시연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부지하가 진아를 잡아둔 건, 부지하 부모님의 힘이 컸구나...’“시연.”은범이 다가와 따뜻한 우유 한 잔과 브라우니가 담긴 접시를 내밀었다.“뭐라도 먹어.”“응.”시연은 웃으며 우유를 받아 두 손으로 감쌌다.은범은 접시는 건네지 않았다.“이건 내가 들고 있을게. 네가 두 손 다 쓰면 먹기 힘들잖아.”“그래.”브라우니를 집어 먹던 시연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성빈이는? 뭐 하느라 안 보여?”그 말에는 은연중에 서운함이 묻어 있었다. 진아를 위한 마음이 컸으니까. “도대체 무슨 축하를 전하라는 거야? 이런 날이면, 직접 와서 ‘축하한다’ 한마디 해 주는 게 맞는 거 아니야? 우리 진아가 그 정도도 안 되나?”은범은 시연의 속상함을 잘 알고 있었다. 진아와 성빈 사이에 있었던 일을 들어 본 적이 있었고, 은범 역시 성빈이 잘못했다고 생각했다.“내가 성
“천만에요.”유건이 은범을 곁눈질하며 물었다.“노 사장님,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네, 다 고 대표님 덕분입니다.”은범은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히 웃었다.“오늘 마침 뵙게 돼서 다행입니다. 정말 감사합니다.”만약 유건이 그 약을 구해오지 않았다면, 은범은 아직도 병실 침대에 누워 있었을 것이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라 해도, 이 말 한마디는 꼭 전하고 싶었다.‘괜히 짐 지우고 싶진 않아서 미뤘던 건데... 그래도 인사는 해야지.’“별말씀을요.”유건은 고개를 저으며, 오히려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저는 노 사장님을 위해서 한 게 아닙니다. 굳이 제게 감사할 필요 없으십니다.”유건의 성격은 늘 저랬다. 은범 같은 성정의 사람과 마주 서면, 오히려 불필요한 부딪힘은 생기지 않았다....휴게실 안은 이미 북적였다. 지하와 진아 부모까지 다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은범, 왔구나.”시연이 눈이 동그래져 이마를 톡 쳤다.“아, 나 진짜 바보 같아. 핸드폰 무음으로 해놨는데... 혹시 전화했었어?”“괜찮아.”은범은 고개를 저으며 부드럽게 웃었다.“오늘은 네가 주인공 보조잖아. 임무에 충실해야지.”실은 시연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아서, 결국 유건에게 길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은범!”진아가 반색하며 달려왔다.“정말 왔네!”초대장은 보냈어도, 은범이 몸을 추스르는 중이라는 걸 알기에, 이런 시끌벅적한 자리에 나타날 거라곤 기대하지 않았다.“응, 와야지.”은범은 예전처럼 너그럽게 미소 지었다.“우리 바비 인형 결혼인데, 내가 빠지면 안 되지.”“바비 인형...”진아는 그 말에 울컥했다.시연, 은범, 진아, 성빈.네 명이 함께했던 학창 시절은 오래된 영화 같아도, 절대 빛바래지 않는 추억이었다.‘그래... 그땐 정말 아무 걱정 없었는데.’게다가 은범이 긴 잠에 빠져 있던 몇 년 동안, 진아는 틈만 나면 병원에 찾아가 그를 챙겼다. 은범과 진아는 겉보기엔 멀게 보였지만, 사실 서로에게 무슨 일이 생
“진아야.”시연은 매우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진아가 진심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걸 단번에 알아챘기 때문이다.“진정하고... 천천히 말해 봐.”“나...”진아는 눈을 꼭 감았다가 고개를 저었다.“나도 모르겠어, 뭐라고 해야 할지. 분명히 알고 있는데...”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 결혼은 온전히 지하의 뜻이라는 걸. 그런데도 여기까지 와 버렸다.“나... 부지하를 못 이기겠어.”그 말에 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한다는 뜻이었다.진아는 시연과 달랐다. 상처받으며 자라온 시연과는 달리, 진아는 어릴 적부터 사랑받고 자란 ‘착한 딸’이었다.그런 진아의 성향을, 지하는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진아 집안을 손쉽게 설득했고, 결국 결혼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굴러가 버렸다.“그래서...”시연은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레 물었다.“지금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그냥 나가서... 예식 안 하고 싶어?”진아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흔들렸다.“진아.”시연은 마음이 저렸다. 그래서 진아의 손을 꼭 잡아주며, 부드럽지만 힘 있게 말했다.“무서워하지 마. 아직 결혼한 것도 아니잖아. 설령 결혼한다고 해도, 네가 원하지 않으면 언제든 끝낼 수 있어.”‘정말... 그럴 수 있을까?’진아는 시연과 달랐다. 부드럽고 망설임이 많은 성격이었다.“근데... 우리 엄마 아빠, 오빠... 다 밖에 있잖아.”진아는 입술을 깨물었다.“내가 만약 약혼식장에서 도망가면... 우리 가족은 어떡해? 망신은 둘째 치고, 부지하 집안이 원한 가지면... 그게 더 무섭잖아.”맞는 말이었다. G시에서 부씨 가문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진아 집안이 가진 모든 걸 잃을 수도 있었다.시연은 할 말을 잃었다. 진아의 걱정은 터무니없는 게 아니었으니까.“괜찮아.”진아는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부지하, 사실 나한텐 잘해. 요즘엔 다 그러잖아. 남편이 돈만 제때 주면, 집에 안 들어와도 상관없다고. 나도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 되잖아. 맞지?”그 미소는 웃음이라기보다 울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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