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
나는 20조 자산의 재벌가 손씨 집안의 막내 아가씨이자 업계에서 소문난 바보다.
어릴 때부터 멍하니 있는 일이 많았고, 아무리 다그쳐도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그런데 손씨 집안 사람들은 하나같이 타고난 인재였다.
오빠는 만 18살에 월가를 휩쓸었고 언니는 만 20살에 박사 학위를 두 개나 따냈다.
그랬기에 부모님은 도무지 내가 손씨 집안의 핏줄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친자 확인 검사만 무려 18번을 했고, 이름난 의사와 전문가란 전문가도 모두 불러들였다.
십여 년을 그렇게 난리를 치고 나서야, 가족들은 결국 하는 수 없이 결과를 받아들였다.
사실 내가 말을 못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말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전생의 나는 한 번도 패소한 적 없는 유능한 변호사였다.
평생 할 말을 전생에 다 해 버렸으니, 이번 생에는 조용히 벙어리로 살고 싶었다.
그런데 오늘, SS그룹이 악의적인 공매도에 시달리며 파산 위기에 몰렸다.
경쟁사에서 인수합병 계약서를 들고 회사까지 들이닥치자, 아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오빠도 계약서 조항을 샅샅이 뒤졌지만 도무지 허점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룹에서 거금을 들여 10년 동안 고용했던 수석 변호사는 진작에 상대방에게 매수된 상태였다.
변호사는 지금 이 순간에도 대의를 위해 희생하는 사람처럼 의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회장님, 사인하시죠. 이것이 손씨 집안을 지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에요. 계약서는 제가 검토했고 아무런 문제도 없어요.”
아빠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떨리는 손으로 펜을 들었다.
듣고 있자니 속이 답답해서 더는 연기를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온 가족이 경악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가운데,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가서 계약서를 세 번째 장으로 넘겼다.
“계약서와 첨부한 문서 사이에 관할권 충돌이 있네요? 여기에 사인하면 손씨 집안은 빈털터리로 쫓겨나는 데다가 20조원 채무까지 떠안게 되고요.”
그런 뒤 고연준을 바라보았다.
나는 웃고 있었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전혀 없었다.
“고 변호사님, 원래 이렇게 손해 보는 장사도 잘하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엔 너무 후하게 나오시는 것 같은데요?”